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슬 Dec 24. 2021

나의 작은 화분

내가 할머니가 된다면


둘째를 낳고 노화가 급속도로 진행 중인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럴 나이가 된 것인지 흰머리카락이 부쩍 늘었다. 일단 아직은 보이는 대로 뽑고 있는데 아무래도 조만간 염색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러다가 엄마 곧 할머니 되겠어."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하나 둘 찾아 뽑으며 5살 아들에게 말했다. 그냥 가볍게 툭 나온 말이었는데 아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이었나 보다.


"뭐어? 엄마가 할머니가 되면 엄마는 어디로 가?"


그의 반응을 해석하느라 잠시 5초 정도 생각에 빠졌다. 한번 더 똑같은 질문으로 재촉받은 나는 겨우 대답을 떠올려본다. 할머니가 된다는 것은 너의 그 할머니(아빠의 엄마)가 되는 게 아니라 늙게 된다는 의미라고. 엄마가 어디 가는 건 아니지만 이 자리에서 점점 늙게 되는 것이라고.


"아 늙는 거. 그래, 할머니 손등처럼 말이지.

잉.. 엄마가 할머니가 되는 건 슬프다..

그런데 엄마가 어떤 할머니가 될지는 궁금해."


흰머리카락 뽑던 손을 멈추고 뒤돌아 아들을 쳐다봤다. 내가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 궁금하다는 사람을 정말 오랜만에 본다. 내 주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이 커서 어떤 사람이 될지, 어떤 모습의 청년이 될지를 궁금해한다. 다 큰 나의 미래가 아니라 덜 큰 아이들의 미래를 궁금해한다. 그런데 더 늙을, 아니 더 클 나의 미래를 궁금해하는 아들 앞에서 하마터면 고맙다고 말할 뻔했다.


나는 더 커서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계속해서 새롭고 따뜻한 것이 내 안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내 안에 머무는 마음 없이, 어딘가에 고여있는 생각 없이, 가벼운 모습으로 살아나가고 싶다. 계속해서 비워내야 또 새로운 것이 샘솟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잘 비워내기 위하여 평생 부지런히 쓰고 그려야지 생각 중이다. 남들이 궁금해하지 않는 나의 미래를 위해 나 스스로 가꾸고 있는 작은 화분 같은 꿈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내 미래의 모습을 궁금해하니 그 작은 화분이 더없이 소중해진다. 나의 산타클로스 같은 아들 덕분에 미래의 내 모습에 하나 더 추가해보기로 했다. 점점 더 나이를 먹고 그때는 별일보다 별일 아닌 일들이 더 많아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타인이나 다른 존재에 대해 계속 궁금해하는 모습의 할머니였으면 좋겠다. 그런 관심의 끈으로 상대의 화분에 작은 리본 하나 만들어줄 수 있다면 내가 그에게 따뜻한 의미로 존재할 수 있을 테니까.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슬퍼.

엄마는 지금이 제일 예쁘단 말이야!"


흰머리카락 뽑다가 갑자기 고백을 받았다. 그렁그렁 촉촉해지는 아들의 눈동자를 포옥 안아주었다. 역시 고백은 달콤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벌서는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