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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Dec 26. 2021

나의 위시리스트에 없는 선물


"그래, 바로 이거지!"


크리스마스 당일 저녁 늦게 도착한 마지막 선물을 받아 들고 5살 아들이 그제야 환희의 얼굴로 소리쳤다. 내가 크리스마스 아침에 그렇게나 기다렸던 바로 그 얼굴이다. 이럴 수가.


5살 아이의 부모로서 크리스마스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이다. 선물을 발견한 아이가 깜짝 놀라 환희에 찬 표정으로 나에게 달려오는 장면을 그리며 우리는 기꺼이 산타가 된다. 그런데 올해 우리 아들은 간밤에 산타할아버지가 두고 간 선물을 보고 약간 심드렁해했었다.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선물에 대한 알콩달콩 궁금한 모습이 없다랄까. 애써 좋아하는 기분을 끌어올리는 듯 어색한 모습이었다.


산타할아버지를 통해 전달한 우리의 선물은 아들이 갖고 싶어 했던 변신로봇과 내가 사주고 싶었던 레고 테이블이었다. 일단 아들은 레고 테이블의 큰 박스를 보고 설레어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장난감이 들어있지 않다며 아예 노골적으로 호감의 눈빛을 거두어들였다. 변신로봇은 그럭저럭 좋아했는데 내가 기대한 극도의 환희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에이~ 자기는 동심을 몰라."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난감을 사주고 싶지 않다는 내 의견에 남편이 동심을 말한다. 그래, 동심 알겠다. 하지만 이미 올해 여러 장난감을 사주었는데 크리스마스에까지 장난감을 사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나의 의견과 아이의 동심을 챙기는 남편의 의견이 합쳐져 레고 테이블과 변신로봇이 올 크리스마스 밤 우리 아들의 머리맡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도 남편은 영 찝찝한 마음이 들고 어딘가 아쉬웠다고 한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이브가 가기 전에 부랴부랴 쿠팡에서 하나를 더 주문했는데, 그것이 바로 아들의 마음에 쏙 들었던 마지막 선물이다.


"그래, 바로 이거지!"

신이 나서 외친 아들의 문장에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내가 그동안 조직의 푸르고 건강한 발전을 그리며 수십 번의 기획안을 써갔는데 심드렁하게 반려당하다가 내가 자고 있는 사이 남편이 후루룩 써 내려간 신박한 기획서가 우리 집 상사의 대만족을 이끌어낸 모양새였다.


나에게 패배를 안겨 준 남편의 신박한 기획서


내가 잠든 사이 남편이 밤늦게 주문한 그 선물은 '베이블레이드'라는 팽이였다. 아들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싶다고 한 위시리스트에 없던 아이템이다. 아들 입에서 이 팽이 장난감에 대한 언급이 나온 그 어떤 기억도 없다. 어떤 배경으로 이 아이템을 고를 수 있었냐고 남편에게 묻진 않았다. 철저히 패배한 나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남편은 얼마 전 내 생일에 '연필깎이'를 선물해준 적이 있다. 생일 아침, 식탁에 곱게 놓여있는 박스를 풀어보니 연필깎이가 나왔다. 나는 좀 의아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의자'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 왜 의자가 아닌 걸까. 단순한 서운함은 아니었다. '이 연필깎이를 어디다가 쓰라는 거지?'


카드를 펼쳐봤다. 답이 나와있었다.


"인생퍼즐을 찾아가는 우리 자기에게 작은 등불이 될만한 선물을 준비해봤어요."


남편이 나에게 선물한 것은 '등불'이었다. 내가 오래도록 쓰고 그리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남편의 애정 어린 선물이었다. 막상 연필을 많이 쓰게 되지 않더라도 나는 이 연필깎이를 보며 부단히 내 마음속 연필의 흑연을 갈고 다듬을 것이다. 이 등불이 내 삶을 밝혀줄 것이다.


남편이 선물해준 등불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아들이 와서 무엇에 대해 쓰고 있냐고 물었다. 베이블레이드에 대해 쓰고 있다고 답해주며, 너 왜 한 번도 갖고 싶다고 한적 없는 베이블레이드를 보고 그렇게 좋아했느냐 (남편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슬쩍 물었다.


"엄마, 나 팽이 좋아해. 그래서 메카드볼도 팽이처럼 굴렸고, 뽀로로 공도 팽이처럼 굴렸잖아."


상사의 열렬한 환호로 통과된 기획안의 비결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아들의 위시리스트에서 발견되지 않았으나 평소 아들의 놀이를 관심 있게 본 아빠의 애정. 선물 받는 사람의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의 위시리스트에 들어있는 (어쩌면 뻔한) 선물이 아니라, 주는 사람의 관심과 애정으로 발견된 선물이어야 했다.


올 겨울, 남편 덕분에 낭만적인 선물의 공식을 배운 것 같다. (더불어 레고 테이블,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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