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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Dec 28. 2021

냉정한 딸


"내 딸이지만 냉정한 아이예요."


우리 엄마가 내 남자 친구(현재 내 남편인 그)에게 한 말이다. 왜 내 남자 친구를 처음 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는가 의아한 마음은 없었다. 다만 엄마가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다. 내가 냉정한 딸이었던가.


얼마 전 확인해본 결과 엄마는 그 말을 황서방에게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계셨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엄마의 그 말을 종종 떠올린다. 그간 나에 대해 '냉정하다'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긍정적인 평가로 보기는 힘든 속성이니 남들이 나에게 쉽게 말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남들은 그렇다 치고 엄마가 왜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는지 단서를 찾고 싶었다.


엄마는 언제부터 나를 냉정하다고 생각했을까.


어렸을 적, 음주가 유일한 취미였던 아빠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하며 우리를 못살게 구는 것이 나는 정말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아빠도 참 불쌍한 청년이었구나 싶지만 그때는 그걸 견뎌야 하는 나 자신만 보였다. 그런 아빠를 그냥 모른 척하던가 적당히 받아주면 될 일이었는데, 나는 동생과 달리 빠득빠득 대들고 노골적으로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그런 나 때문에 아빠는 더 불쌍해졌다. 어느 날 일기에다가 '아빠를 더 이상 아빠로 부르고 싶지 않다'는 내용의 일기를 쓴 적이 있다. 엄마가 그 일기장을 본 것 같았다. 그 일기 내용을 가지고 나에게 뭐라 하신 적은 없지만, 잠결에 엄마가 할머니에게 그 일기장 내용을 얘기하며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내가 냉정하다고 생각했을까.


술에 취해 비틀대는 파김치의 모습으로 대문에 들어서는 아빠가 떠오른다. 그날도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또 그 앞에 불려 앉아 아빠의 고단한 넋두리를 들어야만 했다. 영혼을 반쯤 내려놓고 건성으로 대답을 하던 중에 갑자기 아빠가 크게 울부짖었다. 진짜 이해할 수 있어서 끄덕이는거냐며 울면서 되물었다. 절반의 영혼을 다시 챙긴 나는 그제야 아빠의 말을 제대로 들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아니 세상에 오지 못한 내 동생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10살이었고,  여동생이 7살이었던  해에 엄마는 시댁에서 그렇게 바라던 대로 아들을 임신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많지 않은 나여도 할머니가 엄마에게 아들  낳는다고 구박하던 몇몇 장면들은 기억에 남아있다. 그런 엄마가 드디어 남동생을 낳으러 병원에 갔는데 며칠 , 동생 없이 엄마와 아빠만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지금까지도  동생이 집에 오지 못했는지 모른다. 지금에 와서 물어볼 자신도 없다.  남동생의 사연을  번도 묻지 않은 이런 내가, 엄마는 냉정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들을 제대로 안아보지 못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뒤로 한채 아빠는 계속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 상실감에 빠진 아빠 앞에서 건성으로 대꾸하는 내가 냉정하게 보였을까.




나는 사실 내 뱃속의 둘째가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심란해했었다. 다들 축하의 인사를 했지만, 막연하게 첫째처럼 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나는 예상과 다른 결과에 당황해했다. 더 솔직하게는, 내가 살아온 이 사회에서 불안하게 딸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가 딸 가진 엄마가 되어 가장 좋았던 점은 '딸만 키운 우리 엄마를 나도 한평생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우리 엄마에게는 아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여러 장면들이 있을 것이다. 남보다 못한 냉정한 딸이 낯설고 두려웠던 장면도 있을 것이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면서 '내가 낳은 딸이 맞나.' 속상해하기도 했을 것이고, '뼛속까지 내 딸이네.' 싶기도 했을 것이다. 앞으로 나도 내 딸과 그런 비슷한 장면 속에 함께 있을 날들이 오겠지.


그러다가 어떤 장면에서는 너무나 사무치게 엄마를 떠올리는 날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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