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슬 Dec 16. 2021

우리 집에 놀러 올래?

맞은편 버스정류장에 다다른 S는 나를 향해 팔을 크게 휘이휘이 저었다. 나도 똑같이 팔을 크게 저어봤다. 손 끝이 만들어내는 반원만큼 내 마음도 둥글게 커진 것 같았다.


S를 마주친 건 어느 추운 오후였다. 허리가 아파 MRI를 찍어본 결과, 허리 디스크 탈출을 확인하여 좀 심란해하던 날이었다. 좀처럼 아픈 적 없던 몸인데 최근 들어 자꾸 삐그덕거리며 '이제 좀 건강에 신경 써'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나이 듦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던 중, 시댁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제 시댁으로 놀러 간 5살 아들이 하룻밤 더 자고 온다는 소식이었다. 나의 노화에 대한 걱정, 그리고 찬 바람에 시린 마음이 갑자기 한 줄기 빛으로 밝아졌다. 자유였다. 나의 자유시간을 더 늘려 오후 내내 놀다가 저녁 먹기 전에 들어가겠다고 남편에게 연락했다. 이제부터 뭘 하면 좋을까. 어딘가에 늘어지게 오래오래 앉아 서랍에 담아둔 글들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일산 밤가시마을 '너의 작업실(너작)'로 향했다.


그날 오후에는 책방지기 탱님이 없고 콩사원님이 너작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사실 너작에 자주 가지는 않는 데다가 콩사원님과는 단 한번 만나봤기 때문에 마스크 낀 나를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이름을 말하려던 순간, "슬님이시죠?"라는 인사가 먼저 왔다. (역시 콩님은 크게 될 인물!) 감탄하며 콩사원님과 인사를 나누던 중, 뒤에서 또 인사가 들려온다. "슬님이시구나." 내 뒷모습만 보고 나를 알아맞힌 S님이 들어왔다.


'아, 나도 드디어 너작의 작업인이 되는 것인가.'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며 타닥타닥 글을 써 내려갔다. 어쩐 일인지 글이 술술 풀렸다. 너작의 마법이다. (탱님, 보고 있지요?) 그러던 중 S가 자리를 접고 일어서길래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도 마저 글을 마무리하는 중, 카톡이 왔다. S였다.




"우리 집에 가서 놀까?"


어릴 적 나는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내가 먼저 그런 말을 한적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 집은 가난했고, 나는 그 가난을 부끄러워하던 소녀였으니까. 그 집은 우리 가족에게 고된 몸을 뉘이는 바닥이었고, 내 어린 시절 온갖 공상으로 가득 채우던 벽이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그냥 '작고 가난한 집' 뿐일 것 같아 쉽사리 보일 수 없는 공간이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 온 사촌 동생이 말했다. "언니야는 왜 이런 집에서 살아?" 아파트에만 살아온 그 어린아이의 눈에는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문이라는 것을 열고 들어가도 밖(마당)인 데다가 거기서 신발을 벗고 들어간 공간이 거실이 아닌 '방'이라는 것이 신기해 보였으리라. 그리고 그 사촌의 가족과 똑같이 네 사람이 사는 집인데 아이의 눈에도 본인의 집보다 훨씬 작아 보였을 것이다.


얼마 전 우리 네 식구가 산책을 하다가 그 옛날 집에 가보자는 말이 나왔다. 아빠와 엄마, 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같이 그 동네에 가본 것은 거의 15년 만에 처음이었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어 아무도 살지 않는 지금의 그 골목에는 내 허리까지 오는 높은 풀들이 가득했다. 사람의 발걸음이 없는 땅에는 이렇게 풀이 높게 자라는구나 신기했다. 그 골목길에서 우리 가족이 부지런히 걸었던 발걸음들을 떠올렸다. 풀이 자랄 틈도 없이 우리 네 식구가 수만 번을 걸어오고 걸어가며 부단히 견뎌냈을 골목길이다. 고된 일상에 점점 바래지고 있었을, 그러나 그때는 꽤 생생했을 그때의 부모님이 가진 젊음을 가까스로 그려내 본다. 고된 날이 많았겠지만 그래도 나와 동생을 보며 웃으셨던 날도 많았을까. 차려주신 밥을 더 잘 먹을걸.




"슬님, 글 쓰고 계시죠? 혹여나 잠깐 산책하고 싶으면 저희 집에 놀러 오실래요?"


지금 우리 집에 놀러 오겠느냐 묻는 제안을 언제 마지막으로 받아봤을까. 고등학생 시절이었나.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S의 이 제안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래도 되나요?"라는 답에 다다르는 1분 동안 거절의 카톡을 썼다가 지웠고, 핑계의 카톡을 썼다가 지웠다.


S에게 나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도 아니고, 너 작의 매일 글쓰기 글방 멤버 사이로서 온라인으로 서로의 글만 읽어왔다가 얼마 전 모임에서 잠깐 얼굴 한번 본 사이였다. 그런데 그런 내가 S의 집에 놀러 갈 자격이 있을까, 정말 가도 되나, 나는 고양이가 무서운데 괜찮을까, 이런 나를 고양이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그녀의 집에 고양이 두 마리가 함께 있다는 것은 이미 글에서 읽어 알고 있었다.)


바로 가방을 싸서 밖에 기다리는 S에게로 나갔다. 마치 학창 시절에 친구와 놀다가 헤어지기 아쉬워 더 놀자며 친구의 집으로 향하는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너무 들뜨고 긴장한 나머지 나는 S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손을 씻는, 아주 기본적인 매너도 잊어버린 채(S님, 죄송합니다...), 그녀가 준 뜨끈한 차와 함께 귤을 홀랑 먹으며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고양이라는 생명체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도 처음이었다. 동물을 무서워하는 내가 고양이들이 함께 사는 S의 집에 놀러 와 있다니. 그 와중에 S의 집에 놓여있는 매력적인 큰 테이블을 보며 내 방에도 이런 걸 놓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현실감각이 좀 떨어지며 마치 꿈결인 것 같았다.


S의 집에서 나와 맞은편 버스 정류장에서 손을 흔드는 S를 보니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내가 어디에 갔다 온 줄 아냐며 엄청 신나게 떠들었다.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 내가 좋았다. 내 일상에 그런 소란이 일어났다는 것도 기뻤다. '그냥' '갑자기' '문득'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아 놀 수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했다.


참 따뜻한 오후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의 글에서 나를 만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