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슬 Jan 07. 2022

실패하고 수정하고 도전하고


2022년 달력을 만들었다.


서툰 포토샵으로 한 땀, 한 땀 엮어 만들었다. 달력의 숫자들이 마치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 같았다. 새해의 하루하루도 반듯하고 소복하게 내 앞에 놓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여행자의 눈으로 살고 싶어 아이슬란드 길 위에서 찍은 사진들을 골랐다. 2022년의 계절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며 각 사진 한 켠에 그림도 그려 넣었다. 달력의 귀퉁이에는 그 달에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문장들도 발췌해 적어봤다.


그리고 오늘 그렇게 만든 달력 출력물을 받기 위해 자유로를 달려 파주에 왔다.


'내 손으로 뭔가 만들어보고 싶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 손으로 도대체 뭘 만들 수 있을까.' 낙담하며 점점 작아지는 나로부터 시작했다. 회사에서 마케팅 자료로 홍보인쇄물을 만들어보긴 했지만 내 역할은 협력사들에게 입만 나불거리는 것이었다. "이건 이렇게 해주시고요, 저건 요렇게 해주시고요." 이렇게 말하며 계속해서 수정을 요청하는 것. 나는 이런 내가 좀 부끄러웠던 것 같다. '뭘 알고 이러나' 하는 협력사들의 눈빛이 느껴지면 나는 더 의식적으로 가면을 고쳐 썼다. 그 가면을 벗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되는 것 같아서 겁이 났다. 시간이 흘러 저기 저 옆에 앉아있는 팀장처럼 그 눈빛조차 인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 너도, 나도, 그리고 많은 업무들이 온라인 플랫폼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내가 하는 업무도 마찬가지였다. 문과인 나는 기술자들이 쓰는 기본적인 언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니 일을 주도하기는커녕 겨우 따라가며 구색만 맞췄다. 우리가 도대체 스스로 뭘 할 줄 아느냐는 내 푸념에 선배들은 우리가 '큰 그림을 그리는 기획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글쎄, 나는 내가 그리는 그림에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못 하나하나를 내가 박아야 하고, 직접 코딩을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온실 같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모르는 소리 하는 인간'으로 남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다. 센 척 만들어주는 가면을 오래 쓰고 있으면 마치 내가 진짜 강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러다가도 때때로 찰랑이는 내 밑천을 발견하면 화들짝 놀라며 더 두꺼운 가면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소속 회사와 직함을 영원히 갖고 살 수 없으며, 아니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니, 세상에서 내 손으로 뭔가를 직접 만들어내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내가 찍은 사진과 손수 그린 그림을 가지고 디자인 출력물을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몇 가지 제작 방향이 잡히면 직접 판매도 해 볼 생각이다.


남편과 얘기를 나누다가 먼저 '달력'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콘텐츠 구독 서비스를 연계시킨다거나 묶음 상품을 만드는 여러 가지 구상을 하다가.. 멈추었다. 일단은 아주 기본적인 달력이라도 '한번 만들어나 보자' 싶었다. 현실은 돌도 안된 아기, 그리고 날이 갈수록 광기가 짙어지는 5살 아들을 돌봐야 했으므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제작'까지 완료하는 것이 목표였다.


회사에서는 너무 쉬운 일에 속하지만 내가 직접 하려니 처음부터 막연했다. 여차저차 내 생각대로 하나씩 준비를 해나갔다. 11월에는 거의 매일 연필 스케치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그 그림이 사진 속에는 특징적으로 자리잡지 못하는 것 같아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주위에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포토샵을 펴서 어설프게라도 모양은 잡았는데 소량 인쇄는 어디에다가 맡겨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는 협력사에 연락을 하려다가 관두었다. 전화 한 통으로 쉽게 가는 길도 있지만 내가 직접 방법을 찾고 싶었다. 해보지 않았을 때는 막막한 마음이 컸는데 뭐 또 해보니 크게 어려울 것도 없었다.


오늘 출력본을 받아보니 역시나 엉성한 게 한둘이 아니다. 달력을 받아 들고 처음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 가만히 쳐다보니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이내 기쁜 마음까지 들었다. 퀘스트처럼 시행착오를 겪어야 다음에 점점 더 잘하는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서  많은 실험에 도전하고 실패하고 수정한 후에  도전해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끝내 나는 '뭔가' 되어있지 않을까.




무광이라고 해서 선택했는데 미끄럽다.. 역시 직접 봤어야 했다.. ㅠㅠ


그림보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내 그림이 오히려 그 아름다움을 방해하는 것 같다. 아쉬움..


내 책상 옆에 1월을 붙여두었다. 그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싱벨리르 바튼 앞에서 새해를 시작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의 좋은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