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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an 13. 2022

내 안에 사는 초6 어린이에게

투명한 글 쓰기


초등학교 6학년 때 교내 논설문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 글을 외워 조회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발표를 해야 했다. 떨지 않기 위해서 수십 번 외우고 또 외웠던 기억이 난다. 정작 그렇게 외운 글의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내가 느낀 기분은 또렷하게 남아있다. 두 가지 감정이었다. 의아함, 그리고 부끄러움.


논설문 시범학교였는지 우리는 거의 매일 한 편씩의 논설문을 뽑아내야(?) 했었다. 그 덕에 수많은 논설문을 쓰고 함께 읽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상을 받은 내 글이 얼마나 밋밋하고 별로였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고 수상의 기쁨보다는 '의아함'이 더 컸다.


더 큰 문제는 '부끄러움'이었다. 이 모든 것은 '김치'에서 시작되었다. '김치를 먹읍시다.'는 내가 최우수상을 수상한 논설문의 주제였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을 쓴 내가 문제였다. 나는 김치를 먹지 않는 어린이였던 것이다.


행동과 주장의 불일치에 대해 시비 거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는 감정을 강하게 느꼈다. 정작 나는 김치를 안 먹는데 김치를 잘 먹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니.. 사람들 앞에서 그 글을 읽어 내릴 때마다 무척 부끄러웠다. 나에게 김치를 잘 먹냐는 질문을 할까 봐 두렵기도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매일 글을 써내야 하는 일은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작년 , 둘째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당시 매일 글을 써보자고 다짐한 건 출산 이후 심해져가는 산후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  작은 존재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붕괴되는 나의 일상을 어딘가에서는 정갈하게 붙잡아두고 싶었다.


 덕에 엉켜있는 감정들을 활자 위에 가지런히 풀어내기도 하고, 나와 아이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좀 더 입체적으로 생각해볼  있었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일상이 아기가 아닌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같아 편안한 만족감도 느꼈다. 물론 산후 우울감도 상당히 해소되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동시에  글이 얼마나 투명한지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혹시 내가  '김치 논설문'처럼  스스로와 멀어지게 될까 봐 두렵다. 부끄러워질까 봐 겁이 난다.


오늘 장강명 작가의  < 한번 써봅시다>  에세이 쓰기 파트에서 ' 솔직해지지 못하는가' 읽다가 '김치 논설문' 불현듯 떠올랐다. 당시에  논설문과 요즘 내가 쓰는 에세이는 다른 장르이지만 글쓴이의 시선이 담긴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선상에 놓일  있을 것이다. 장강명 작가는 솔직한 에세이를 쓰지 못하는 이유를  가지로 꼽는다. 욕먹는 것이 두려워서, 뽐내고 싶은 욕심 때문에, 훈과 감동에 집착하게 되면서, 그렇게 솔직함과 멀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치 논설문' 썼던 6학년 어린이가 떠올랐다.


아직도 내 안에 살고 있는 그 어린이.

칭찬받고 싶었고, 그럴듯해 보이고 싶었으며, 억지로 훈을 만들어낸  어린이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말해주고 싶다.


" ' 굳이  김치를 먹어야 하는 겁니까?' 하는 진짜  속마음을 드러내 보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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