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글 쓰기
초등학교 6학년 때 교내 논설문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 글을 외워 조회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발표를 해야 했다. 떨지 않기 위해서 수십 번 외우고 또 외웠던 기억이 난다. 정작 그렇게 외운 글의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내가 느낀 기분은 또렷하게 남아있다. 두 가지 감정이었다. 의아함, 그리고 부끄러움.
논설문 시범학교였는지 우리는 거의 매일 한 편씩의 논설문을 뽑아내야(?) 했었다. 그 덕에 수많은 논설문을 쓰고 함께 읽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상을 받은 내 글이 얼마나 밋밋하고 별로였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고 수상의 기쁨보다는 '의아함'이 더 컸다.
더 큰 문제는 '부끄러움'이었다. 이 모든 것은 '김치'에서 시작되었다. '김치를 먹읍시다.'는 내가 최우수상을 수상한 논설문의 주제였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을 쓴 내가 문제였다. 나는 김치를 먹지 않는 어린이였던 것이다.
행동과 주장의 불일치에 대해 시비 거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는 감정을 강하게 느꼈다. 정작 나는 김치를 안 먹는데 김치를 잘 먹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니.. 사람들 앞에서 그 글을 읽어 내릴 때마다 무척 부끄러웠다. 나에게 김치를 잘 먹냐는 질문을 할까 봐 두렵기도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매일 글을 써내야 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작년 초, 둘째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그 당시 매일 글을 써보자고 다짐한 건 출산 이후 심해져가는 산후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 이 작은 존재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붕괴되는 나의 일상을 어딘가에서는 정갈하게 붙잡아두고 싶었다.
그 덕에 엉켜있는 감정들을 활자 위에 가지런히 풀어내기도 하고, 나와 아이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좀 더 입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글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내 일상이 아기가 아닌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편안한 만족감도 느꼈다. 물론 산후 우울감도 상당히 해소되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동시에 내 글이 얼마나 투명한지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혹시 내가 그 '김치 논설문'처럼 나 스스로와 멀어지게 될까 봐 두렵다. 부끄러워질까 봐 겁이 난다.
오늘 장강명 작가의 책 <책 한번 써봅시다> 중 에세이 쓰기 파트에서 '왜 솔직해지지 못하는가'를 읽다가 '김치 논설문'이 불현듯 떠올랐다. 당시에 쓴 논설문과 요즘 내가 쓰는 에세이는 다른 장르이지만 글쓴이의 시선이 담긴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선상에 놓일 수 있을 것이다. 장강명 작가는 솔직한 에세이를 쓰지 못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꼽는다. 욕먹는 것이 두려워서, 뽐내고 싶은 욕심 때문에, 교훈과 감동에 집착하게 되면서, 그렇게 솔직함과 멀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치 논설문'을 썼던 6학년 어린이가 떠올랐다.
아직도 내 안에 살고 있는 그 어린이.
칭찬받고 싶었고, 그럴듯해 보이고 싶었으며, 억지로 교훈을 만들어낸 그 어린이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말해주고 싶다.
" '왜 굳이 짠 김치를 먹어야 하는 겁니까?' 하는 진짜 네 속마음을 드러내 보는 게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