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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an 16. 2022

우회전을 하다가


운전 중이다. 자동차 룸미러로 뒤에 서 있는 차를 힐끗 확인한다. 이미 나의 상체는 좌석에서 떨어져 핸들 쪽으로 바짝 다가가 있다. 눈알을 룸미러 쪽으로 굴리며 앞으로 조금씩 바퀴를 굴려본다. 슬금슬금 가는 척만 한다.


빵빵!


역시나 뒤에서 신경질적인 경적을 울린다. 빨리 가지 않고 뭐하냐는 소리이다. 오른발로 엑셀을 조금 더 힘껏 밟는다. 우회전하여 횡단보도를 딛고 가로지른다. 그 순간 내 시야에 검은 무언가가 나타났다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사각지대에서 달려 나오는 바람에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보행자이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약 3초간의 상상이었다.

상상이 현실로 될 새가 없이 차라리 더 빠르게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빠져나온다. 앞으로 뻗은 주행 차선을 보니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운전할 때 가장 긴장되는 순간 중 하나는 횡단보도를 앞에 두고 우회전을 해야 할 때이다. 사실 그 상황에서는 굳이 긴장할 필요 없이 그냥 정지하면 된다. 횡단보도 앞에서 일단정지하는 것이 기본적인 교통법규이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긴장되는 게 아니라 눈치가 보이는 것이다. 보행자의 유무를 살피는 동시에 룸미러로 뒤차의 분위기를 계속 본다. 뒤차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이다. 아직 인도에 다다르지 못했으나 멀찍이 떨어져 걷는 보행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즈음 뒤차는 어서 횡단보도를 지나가라고 어김없이 나를 재촉한다. 성화에 못 이겨 내 차의 바퀴를 굴린다. 보행자의 발과 내 차의 바퀴가 같은 횡단보도에 있다. 이 순간 나는 참으로 찝찝한 기분이 든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우르르 인파에 등 떠밀리듯 바퀴를 굴린다.


새해부터는 관련 법규가 강화되어 교차로에서 우회전 주행을 할 때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가 있다면 무조건 멈춰 서야 한다. 하반기부터는 신호등이 없는 작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인근에 보행자가 있다면 '일단정지'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맘 편하게 일단 정지하는 것이 가능해질까. 글쎄.


법이 개선되고 세상이 점점 살기 좋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조금 더 느린 속도로 따라간다. 그래서 여전히 사람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가 같은 횡단보도에 있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드는 순간이 있다.


술 취한 임원이 신입사원이었던 나의 손을 만지작 거릴 때도 그랬다. 그 장면을 본 여러 선배들의 침묵과 함께 나도 그냥 흘러갔다. 여직원은 결혼도 늦게 하고 아이도 늦게 낳아야 회사에서 잘 나간다는 소리를 들을 때도 그랬다. '이건 아닌데..' 하며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구성원을 보호하는 법이 강화되고 관련된 사회 지표들도 어느 정도 개선되고 있으나 사람들의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아닌 걸 알면서도 휩쓸려 흘러가는 나 역시 크게 변하지 않은,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찝찝한 기분이 드는 날이었다. 뒤차의 경적에 대꾸하지 못하고 우회전을 해버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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