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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an 17. 2022

살아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천고가 높고 사방이 통유리로 둘러싸인 이 카페에는 이미 찬 공기가 가득하다. 자리를 잡고 의자에 코트와 목도리를 벗어 걸어두었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고 나는 계속해서 책을 읽는다. 우연을 탐구하는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와 질병을 조사하는 의료 인류학자 이소노 마호,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이다.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현재 이 카페에 손님은 나 혼자 뿐이다. 사장님께서 전기난로를 내 등 뒤로 조용히 옮겨 켜주셨다. 의식하는 반응 없이 책을 계속해서 읽었다. 난로의 온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춥다. 의자에 걸쳐놓은 코트와 목도리를 가져와 냉기를 떨쳐내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다.


갑자기 코트를 입고 깃을 여미는 나를 보고 사장님께서 미안해하고 마음 쓸까  그러지 못했다. 괜스레 처음 만난 카페 사장님과 불편한 대화를 나누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었다. 내가 치른 커피값만큼의 커피를 제공하는 카페 주인과  커피를 마시는 손님,  둘의 상호 계약 틀을 넘지 않는 거리. 불필요한 마음의 부채를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그만큼의 거리.


그 거리를 점점 좁히다가 두 영혼이 맞닿게 되고, 함께 나아가기 시작하면 그때 ‘우정’이 움튼다.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 중에는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 저 앞에 술 취해 비틀거리는 취객의 뒷모습이 나의 아버지 것이라는 사실을 털어놓거나, 저기 가난한 동네의 한 골목 끝에 우리 집에 있는데 언젠가 놀러 오겠냐 묻는 순간. '나의 세계로 들어오겠니?' 물으며 문의 손잡이를 돌려보는 순간이다.


여기 이 두 학자가 서로에게 문을 여는 결정적 순간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처음에는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두 사람이 서로를 배려하여 빙빙 겉도는 정돈된 대화를 시작한다. 이내 이들은 정돈된 대화로부터 해방되기를 희망한다. ‘곧 가까워질 미래’에 대해 공유하고, 그 ‘미래를 향한 모험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그러기 위해 미야노 씨가 다시금 해방해주었으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공유했으면 하는 미래가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일곱 번째 편지 중


마치 남의 편지를 몰래 읽다가 충격적인 문장에 다다른 도둑처럼 화들짝 놀라 책을 덮었다. 열 편의 편지 중 일곱 번째 편지에서 ‘죽음’에 대한 단도직입적인 언급이 나온다. 이 문장을 읽다가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내가 처음부터 (아프지 않은) 이소노 마호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몸이 아픈 미야노 마키코의 상태를 궁금해하고,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이소노 마호의 편에서 몰입하고 있었다. 나는 현재 아프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기적인 현실감각과 빈약한 상상력에 스스로 너무 놀라고 부끄러웠다. 병이란 우연처럼 언제든 누구에게든 올 수 있는 것인데 마치 평생 그 우연이 나에게서 비껴갈 것처럼 굴고 있었던 것이다. 여덟 번째 편지부터는 의도적으로 ‘죽음을 실감하며 살게 된’ 미야노 마키코의 입장에서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죽음


이렇게 갑자기 이 단어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이 책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의식했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단어였다. 죽음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오고 "언젠가 어디에선가 반드시 마지막을 맞아 점이 될 수밖에 없"지만, 이 두 학자는 '바람직하게 연결될 뿐인 점'이 되기를 거부하고 '계속 선을 그리'기로 다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장 한 시간 후에 벌어질 일도 장담할 수 없는 삶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살아있으니 '미래'를 바라보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함께' 움직인다. 계속해서 운동한다. 그래야 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의 두께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선으로 나아간다. 그 선은 '나'라는 점이 소멸해도 운동을 계속하여 나아가 세계에 닿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척 궁금하다. 매일 몸과 정신에서 매우 생생한 죽음을 느끼면서도 미야노는 어떻게 '시작'을 말할 수 있었을까. (그는 이 말을 한 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눈을 감았다고 한다.) 영혼을 나눈 우정의 대화 덕분이었을까, 평생 '우연'을 연구한 철학자로서 궁극의 깨달음에 다다른 것일까.


"어쩜 이 세계란 이토록 경이로울까, 저는 '시작'을 앞에 두고 사랑스러움을 느낍니다. 우연과 운명을 통해서 타자와 함께하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지금 제가 도달한 결론입니다."
-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열 번째 편지 중




책을 펼쳐 읽을 때마다 눈물이 차올랐다. 상상의 미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피할 수 없는 가까운 미래에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직감한 내가 앉아있다. 과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로 남겨보자는 친구가 곁에 있다면 나는 어떤 심정일까. 내 안에 있는 힘을 누구보다 믿는 친구가 내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도망치지 마. 더 할 수 있어.”라며 손을 잡아끈다면..


이 책을 두 명의 친구에게 추천했다.

한 명은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인간적이고 깊은 대화를 좋아할 것 같은, 친구.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오랜 시간을 함께 했고 내가 '죽어가는 것'을 실감할 때 우리의 모든 이야기를 함께 기록해주었으면 하는, 친구.


살아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은 어차피 같은 말이었다. 그러니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다. 죽음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함께 선을 만들어 나가지 않겠느냐고. 분명 아름다울거라고.




* 이상 일부 따옴표 문장은 책 속 구절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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