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뒷모습
"세상에 하나뿐인 내 주하! 내 동생 귀여워!"
다행히 나의 첫째 아이는 동생을 예뻐하고 귀여워한다. 동생이 병원과 산후조리원을 거쳐 집에 온 날에는 온 집안의 인형들을 불러 모아서 동생을 소개했다. "얘들아, 우주(태명)가 태어났어! 우리가 돌봐줘야 해." 시간이 흘러, 그의 초심과 달리 어쩔 수 없이 질투가 나고 미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 같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는 동생을 무척 사랑한다. (다만 힘 조절이 서툰 것뿐..)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우리가 찍는 아이들 사진에는 거의 다 남매가 함께이다. 다시 말해, 둘째 아이가 커서 보게 될 사진에는 거의 대부분 오빠가 함께 들어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동생을 웃기고 싶어 하는 오빠의 괴상한 표정과 기괴한 몸짓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날 것이다. 오빠에게 세상 하나뿐인 사랑을 받으며 소중히 존재한 본인 스스로를.
나에게도 세상 하나뿐인 여동생이 있다.
첫째 아이가 동생을 툭툭 괴롭힐 때마다 사실 나는 내 어릴 적 동생에게 잘못했던 장면들이 자주 떠오른다. 나 역시도 별로 좋은 언니가 아니었는데 누가 누구에게 훈계를 하는가 싶어서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면서 요즘 자꾸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여간해서 '후회'라는 것을 잘 하지 않는 내가 유독 부끄러워하는 기억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 스스로 가장 비겁했다고 여기는 장면 - 골목과 개와 동생, 그리고 도망자.
어릴 적 그 시절에는 목줄을 하지 않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큰 개들이 참 많았다. 골목에서 개와 마주치게 되는 상황은 몸이 다 큰 지금 상상해봐도 심장이 서늘하다. 어릴 적에는 심장이 멈출 것처럼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과 함께 걷던 골목길에서 큰 개를 한 마리 만났다. 우리는 파르르 떨며 본능적으로 벽에 등을 붙였다. 약한 마음은 투명한 눈동자에서 가장 먼저 표시가 나는 것일까. 우리 눈을 보고 그 개가 더 크게 짖기 시작했다. 개 짖는 소리가 작아질 때까지 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 동생을 그대로 놔두고 나 혼자 도망쳤다.
달리다가 딱 한번 뒤돌아봤다. 얼룩덜룩한 하얀 개가 동생을 향해 목을 한껏 빼 우렁차게 짖고 있고, 그 앞에서 동생의 작은 얼굴이 빨개졌다가 시퍼레졌다가 같이 울부짖었다. 그때 본 동생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시 돌아가려는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들었을까. 그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쪽으로도 저 쪽으로도 발걸음을 떼기 힘들었던 순간이었다. 골목으로 돌아가려니 개가 무섭고, 집으로 돌아가려니 부모님이 무서워서 한참을 울며 걷다가 겨우 집으로 돌아갔던 날이었다.
살면서 내 눈앞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순간과 자주 마주한다. 그 선택지 중 하나 정도는 어김없이 내가 비겁해지는 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서운 개와 마주쳤던 골목길의 기억 덕분에 그 선택을 가장 먼저 지우는 용기를 낸다. 그 용기를 내게 만드는 것은 골목길에서 뒤돌아본 동생의 얼굴이 아니다. 동생이 혼자 공포 속에서 눈알을 굴려 겨우 쳐다봤을, 나의 뒷모습이다.
당연히 나의 기억에는 그 뒷모습이 없다. 나는 그저 동생의 시선에서 상상만 해 볼 뿐이다. 나의 상상 속, 비겁한 작은 등허리에는 원망과 배신감과 공포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누군가의 시선에 내가 그런 모습으로 존재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언제나 부끄러워질 수 있다. 그 부끄러움은 앞으로 오래도록 내게 용기를 내도록 할 것이다.
나의 아들과 딸 사이에도 수많은 기억들이 흐를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았다는 감각뿐만 아니라 서로의 시선에 서 보며 삶의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길. 그리고 그것이 각자의 삶을 더욱더 건강하게 지탱해 줄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