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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Mar 25. 2022

엄마의 일


"엄마!! '역할'이 뭐야?"

"음, '해야 할 일'? 엄마의 역할은 뭐야?"

"음.. 일 하는 것!"


역시 워킹맘의 아들인가. 엄마의 역할을 '일 하는 것'이라고 답하는 아이를 보며 깜짝 놀랐다. 사실 '식사를 챙겨주는 것', 또는 '나를 돌보는 것' 정도로 답할 줄 알았다. '일 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래서 깜짝 놀랐고 이내 뿌듯해졌다.


안쓰럽다거나 미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려고 했으나 접어 넣었다.


"고마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 전통적인 엄마의 역할뿐만 아니라 그 외에 다른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사실 아이는 별 뜻 없이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아이 생각에 가족을 돌보고 끼니를 챙겨주고 우리 곁을 보살피는 '엄마'의 행동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하는 일'의 범주에 들어있을지도 모르니까. 왠지 의무적인 냄새를 풍기는 '해야 할 일'이라는 건 엄마에게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고마웠다.




둘째 아이의 출산으로 생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으로 회사에 가지 않은지 14개월째에 접어들고 있다. 6살이 된 첫째 아이는 아직도 내가 여전히 회사에 가는 줄 알고 있다. 다만 동생을 돌보느라 이전처럼 해가 진 후에 귀가하지 않고 좀 더 일찍 퇴근하는 것이라고 얘기해주었다. 나는 원래 일하는 사람이며, 지금도 일을 하고, 앞으로도 일을 할 것이라는 인식을 아이에게 심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혼자 어린이집에 출근하는 줄 알면 억울해할까 봐 그런 것도 있다.) 지금 회사에 가고 있지 않지만 난 여전히 다양한 일을 하고 있으니 아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해 나갈까.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싶은 걸까.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건 어떤 일일까.라는 고민을 많이 한다. '엄마의 역할'에 대한 아이의 대답을 듣고 나서는 고민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신발 브랜드 신(SYNN)을 운영하는 김리온 대표님의 '리온 서재' 콘텐츠를 좋아한다. 얼마 전, 리온 대표님이 구병모 작가님의 <바늘과 가죽의 시> 책을 소개한 팟캐스트를 듣다가, 책 얘기보다도 리온 대표님의 말 한마디에 오래도록 생각이 머물렀다.


"저는 이 일에 제 영혼을 넣었거든요."


이 책은 구두장이 이야기인데 리온 대표님의 일과 닿아있다 보니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씀이 많았다. 대표님에게 이 일은 영혼이 들어간 일이라 무척 신나게 하는 구두 이야기들이 타인에게는 불편하게 들릴까 우려하며 꺼낸 말씀이었다. 흔히 우리가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아, 영혼을 갈아 넣어야 했어."라는 뉘앙스와는 아예 결이 다른, 매우 당연한 자부심이 들어있는 말이었다.


나도 나의 영혼을 넣고 귀한 시간을 들여 완성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일이라면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아이는 자연스럽게 나의 일을 함께 소중히 여기고 존중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에 타면 항상 조용한 노래가 나와."


그랬던 그 엄마가 얼마 전에 아이 앞에서 크라잉넛 노래를 들으며 방방 뛰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언제쯤 음악 페스티벌에 갈 수 있을까(뷰민라 라인업이 다 나왔던데..)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차에 크라잉넛 노래를 들으니 갑자기 잔디밭에 서있는 것 같았다. 엄청 큰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이는 그런 나를 무척이나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만 반짝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아빠에게 "엄마도 이렇게 큰 (소리의) 노래 좋아해!"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나의 색다른 모습을 아이가 알아주고 기억해줘서 고마웠다.


'우리 엄마는 나를 돌보는 사람이지만 회사에서 일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읽거나, 또는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사진을 찍는 일도 . 음식을 만들어 나만 먹이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도 하지. 조용한 노래를 좋아하고  작은 목소리로 따라 부르지만, 때때로 쿵쾅거리는 음악을 들으며 아주  소리를 내기도 .'


아이가 앞으로도 나를, 그리고 마주하는 모두를 입체적인 존재로 바라봤으면 좋겠다. 나도 그런 눈을 갖고 싶다.



덧)

"너의 역할은 뭐야?"

"규칙과 약속을 잘 지키고 엄마 말을 잘 듣는 것"

"아빠의 역할은 뭐야?"

"요리하는 것과 커피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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