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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May 14. 2022

지금, 여기, 머무를 수 있도록

아이와의 여행 6년 차


미리부터 달력에 크게 적어둔 독서모임이 취소되었다. 남편에게는 굳이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예정대로 집을 나섰고 그 시간에 독서모임 대신 글방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아내의 독서모임 참석을 위해 아이 둘을 먹이고 재우는 것까지 혼자 도맡아 하기로 한 남편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모처럼 생긴 저녁의 술 약속에 훌훌 자유롭게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사실대로 말해도 못 가게 막아 설 남편이 아닌데 묘한 일탈감에 사실을 감추게 되었다.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마음은 조금 무거웠다.


그러고보니 아이들과 떠나는 여행길에서도 나는 늘 이런 상태와 비슷하다. 새로운 장소를 걸어 볼 생각에 발걸음은 가볍지만 또 얼마나 고생스러울까 마음은 조금 무거운 상태.     




'아, 혼자 왔었다면..'

'남편과 둘이 가볍게 왔었다면..'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 나는 늘 힘들어했다. 평화로운 풍경을 찾아 집을 떠났지만 막상 도착한 그곳에서 내 마음의 평화는 없었다.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나는 자주 눈물을 훔쳤고, 괜히 남편을 원망했고, 당장이라도 자유를 찾아 떠날 것처럼 분노했다. 아이들의 재롱에 한없이 즐겁다가도 또 금방 나락으로 떨어졌다. 영화 <아가씨>에 나오는 대사처럼 그들은 정말 '나를 망치러 온 구원자'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주에 다녀온 강원도 여행에서는 혼자 있고 싶다거나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여행에 임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계속해서 나를 현재에 붙들어 준 덕분에 나는 여행 내내 '지금', 그리고 '여기' 머무를 수 있었다. 언젠가 글방에 공유한 글을 읽고 탱언니가 '지금 이 계절을 충실하게 살아요, 우리-'라는 댓글을 달아줬는데 그 문장이 좋아서 노트에 적어둔 적이 있다.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그 문장도, 나의 아이들도, 나를 구원해주고 있다.


아침마다 다리가 길어져있어서 이미 매일 놀라고 있지만 6살 우리 아들의 성장이 특히나 더욱 실감 났던 여행이었다. 아이가 이제는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컸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울컥 눈물이 날 뻔한 순간도 있었다. "아, 엄마 기분 너무너무 좋아."라는 내 말을 들은 아들이 환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엄마, 나도 너무너무 좋아."라고 말했다. '엄마가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니'라는 말이 어딘가에 생략되어있다는 것을 아들의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고마웠다.


고마운 나의 아들은 내 정신이 조금 멀어지는 것 같으면 눈앞의 모래를 먹는 등 나를 어떻게든 현재에 묶어두었다. 아직 카시트와 여행길이 익숙지 않은 2살 동생 때문에 나의 작은 한숨이 들릴 때면 어떻게 해서든 동생을 웃기려고 괴상한 행동을 했다. 남편은 내가 가고 싶어 했던 곳을 기억해뒀다가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신경 써주었다. 그의 크고 작은 배려 덕분에 나는 작게나마 여유를 즐길 수 있기도 했다.



     

맥주를 기분 좋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 글에서 남편 이야기를 종종 읽은 한 친구가 말했다. “아, 구슬 남편 좋아. 한 번도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왠지 좋아.”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왠지 남편이 보고 싶어 졌다. 맨날 보는 남편이 보고 싶어 지다니, 술기운 때문인 걸까. 버스 안에서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독서모임은 취소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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