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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Apr 26. 2022

보름달의 인사


"엄마, 눈을 떠봐! 제발 눈을 떠! 엄마, 제발!"     


아이들을 재우다가 내가 먼저 잠이 들었다. 6살 아들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이다. 온몸이 무거운 나는 그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잠든 척했다. 아니, 죽은 척했다. 아들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잠결에 점점 아득해져 간다. 무거운 내 몸이 침대 아래 큰 구멍으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다. 그 순간, 곁에 있던 아들이 순식간에 다 큰 성인이 되어 커다란 어깨를 위아래로 흔들며 흐느낀다. 그의 앞에는 숨을 멈춘 노년의 할머니가 반듯하게 누워있다. '훗날 내가 죽으면 우리 아들이 이렇게 울겠구나...'     


5년 전, 아흔의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바람처럼 가볍게 마지막 숨을 내쉬던 얼굴 옆에서 나는 두 개의 심장이 뛰는 무거운 몸으로 앉아있었다. 서울로 시집간 손녀딸은 마침 출장차 고향인 대구에 와있었는데 그때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무리 떨어져 살더라도 볼 자식들은 다 보고 죽는다더니 손주 중 가장 멀리 살던 내가 가장 가까이에서 할머니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다행이었다.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들은 제발 눈을 떠보라고 소리치며 아직도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내 얼굴 위로 아이의 눈물이 떨어진다. 눈물이 주름 사이에 고인다. 침대에 누워있던 할머니의 주름이 떠오른다.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할머니에게 제발 눈을 떠보라고 이렇게 울부짖지 않았다. 아흔이 되어서도 증손주들을 보드랍게 안을 수 있었고, 이 생의 마지막 시간에도 큰 고통 없이 편안해 보이셨다. 호상이었다. 가족들과 장례식장에 온 조문객들 모두 큰 슬픔 없이 덤덤했다. 지금 내가 곧 죽는다면 호상이 아닌 걸까. 내 곁의 사람들은 나와 덤덤하게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을까. 우는 오빠 옆에서 무구하게 깔깔대며 내 얼굴을 만지는 두 살배기 딸아이의 손길을 느끼고 있자니,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장 완벽하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던 날이 언제였을까. 어느 가을날, 합정에서 그를 만났다. 20대 내내 헤어졌다가 만났다가 싸우다가 헤어진, 그러나 헤어지지 못한 전 남자 친구였다. 이제는 정말 우리 사이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제대로 인사를 하고 싶었다. 따뜻한 홍차 두 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우리 인생의 푸른 20대에 서로가 서로의 취향에 영향을 준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부해졌는지 감사의 인사를 나누었다. 앞으로의 삶도 잘 살아라 응원을 나누고,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우리는 그 홍차집 앞에서 헤어졌다. 몇 걸음 가다 뒤돌아서서 인파 속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등에 걸려있는 나의 20대 시간들이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제야 헤어졌다. 잘 헤어졌다.     


죽음이 언제 들이닥칠지 알 수 없지만 그게 언제라도 좋은 이별이 되길 감히 바란다. 그러기 위해 매일 멀어지고 있는 오늘에게도 매 순간 진하게 인사를 나누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리고 그들 눈에 담긴 오늘의 나에게도 잘 인사하고 싶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어쩌면 잘 인사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눈을 떴다. 어두운 방 허공에 둥글고 커다란 보름달 두 개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달 하나는 그렁그렁 울고 있고, 또 다른 달 하나는 방실방실 웃고 있다. '인간은 달까지는 갈 수 있어도, 후네처럼 죽지는 못한다. 달까지 가기 때문에 후네처럼 못 죽는다.' 사노 요코 할머니가 쓴 <어쩌면 좋아>의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내가 낳은 이 두 개의 보름달 때문에 후네처럼 죽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어둠 속에서 다시 빛나는 내 눈을 본 아들이 나를 힘껏 껴안았다. 어렴풋이 이별을 알아버린 보름달의 뜨거운 인사가 가슴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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