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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May 04. 2022

돈과 가난의 관계

여행자의 깨달음


(우리 글방에서는 매달 초 자기소개 글을 써서 공유한다. 이때 글감 키워드가 주어지는데 이번 달의 키워드는 '돈'이다.)


'돈'이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리며 내 소개를 하려니 어김없이 참 돈이 없던 시절이 떠오른다. 당장이라도 가난 배틀을 시작할 것처럼 어린 시절의 가난한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앞다투어 상영되기 시작한다. 학교 준비물 종이를 내밀었을 때 엄마로부터 나오던 작은 한숨, 월급봉투를 잃어버린 채 만취 상태로 들어온 아빠를 보며 그만 울어버린 엄마의 얼굴, 내 오른쪽 어금니에 충치가 생겨 금으로 때워야 하는데 그게 너무 비싸서 나를 혼내고 속상해하던 엄마의 뒷모습 등등. 이상하게 엄마에 대한 기억들이 많이 떠오른다. 마침 친정에 내려와 있어서 더 그런 걸까. 손녀딸을 쳐다보고 있는 늙은 엄마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다. 가난한 기억 속 젊은 엄마의 얼굴이 슬쩍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엄마 언제 이렇게 늙었지.


나의 엄마 앞에 앉아있는 나의 작은 딸을 바라본다. 이마에 떨어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고운 살결에 하얀 햇살이 내리쬐니 정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문득 길 위에 쏟아지던 하얀 햇살이 떠오른다. 무척 더웠던 한여름의 여행길이었다. 내가 가장 자유로웠던 그 길, 그때의 햇살이 딱 이렇게 눈부셨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내 평생 가장 가난했지만 가장 풍요로웠던 시간을 보냈다.


아르바이트해서 1년을 꼬박 모은 돈을 가지고 뉴욕으로 떠났다. 그 후 뉴욕에서의 1년간 인턴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다시 떠났다. 등에는 작은 배낭 하나, 목에는 펜탁스 미슈퍼 필름 카메라를 멘 검정머리 단발의 동양인 여자. 그 여자는 혼자서 미국 횡단 여행길에 올랐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용감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살아 돌아온 게 다행이었다.


몇몇 도시에서는 좀처럼 저렴한 숙소를 구하기 힘들어 해가 지면 공항으로 들어와 잠을 청했다. 작은 도시에서는 인디언 노숙자들이 가끔 머무르는 저렴한 숙소에서 묵을 수 있었지만 어김없이 쥐가 기어 다니는 곳이었다. (뉴욕에서의 1년을 쥐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그럭저럭 괜찮았다.) 음식을 사 먹는 건 꽤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무더운 한여름의 여행길에서 주로 생수만 사서 마셨고, 서브웨이 샌드위치 하나로 이틀 정도를 버텼다. 15년쯤 지난 최근의 언젠가 내 동생이 이 샌드위치 일화를 얘기하면서 울먹이는 바람에 이게 불쌍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불쌍해 보이는 이 여행길에는 사실 돈으로 사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넘쳐났다. 아무리 걸어도 끝나지 않는 길이 내 발 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디를 가든 내 의지로 나아갈 수 있었고, 얼마나 머무르든 자유로운 시간이 내 손안에 있었다. 걷다가 주저앉아 책을 읽었고, (비록 지금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거의 모든 문장에 감동을 실어 마음에 담았다. 외롭거나 무서울 때는 그 문장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르는 날에는 편지 같은 일기를 썼다.


도시 간 이동할 때에는 요금이 저렴한 기차를 이용했다. 그야말로 거대한 대륙이니 기차로 2박 3일을 이동해야 할 구간도 있었다. 그 밤, 나는 기차 객실의 작은 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문득 창밖을 봤는데 시커먼 밤하늘에 또각 걸린 달과 별이 내 창문을 따라오고 있었다. 동시에 기차가 철로에 부딪히며 덜컹거리는 마찰음이 내 등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길 위에 있었다. 내 운명 어딘가 뿌리 깊게 박힌 방랑벽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아마 다시는 그런 여행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의 존재를 곧 온 세상으로 여기는 작은 두 아이의 엄마이자, 나에게 미래의 모든 시간을 걸고 나란히 서기로 약속한 한 남자의 아내. 이제 마흔을 코앞에 둔 여행자의 등에는 배낭 대신 새로운 역할들이 얹어져 있다. 13년째 이어지고 있는 월급쟁이의 역할 덕분에 주머니에 가진 것도 조금은 더 많아졌다. 나는 이제 낯선 (그리고 위험한) 길 위에 홀로 서게 되거나, 외로운 달빛에 기대 책을 읽는 가난한 여행자가 되기 힘들 것이다. 다만,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꽤나 풍요로웠던 그 여행자를 떠올리며 이제 매일 책장을 가꾸는 여행책 서점의 책방지기가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이 달빛 아래 어느 길 위에서 한 여행자의 손에 쥐어지게 되려나 상상하며.


앞서 쓴 문장 하나를 수정해야겠다.


  위에서 나는  평생 가장 돈이 없었지만 가장 풍요로웠던 시간을 보냈다. 돈이 없었지만 가난하지 않았여행자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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