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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Apr 21. 2022

떠오른 얼굴들 중에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뻔했다는 소식을 일주일쯤 지나서 듣게 되었다.   

   

아버님은 업무 차 부산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그날도 어김없이 혼자 숙소에 누워 잠을 청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코피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혈은커녕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양의 피가 쏟아졌고, 코를 막으면 목으로 입으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러다가 과다출혈로 죽겠다 싶어서 다급히 하신 일이 휴대폰 잠금 설정을 풀어두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휴대폰 연락처에 닿을 수 있도록. 그리고 손수 119에 전화해서 구조 요청을 하셨다.   

   

구급대원과의 통화내용을 녹음파일로 전달받아 일산에서 나머지 식구들과 함께 들었다. 남편도 처음 듣는다는 아버지의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피가 자꾸만 목을 쳐서 말씀을 힘들어하셨다. 당황스럽고 긴박한 대화 속에서 들려오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있었다. 바로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겁에 질려 있으셨다. 혼자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싶은 생각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났다. ‘엄마, 왜 울어?’ 하는 아들의 말에 내가 더 크게 울어, 남편까지 목이 메고 어머님도 눈물을 훔치시며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우리는 아마 다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다면, 이게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가끔 아들이 살짝 흘리는 코피만 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빨간 피는 그냥 무조건 무섭다. 하물며 성인이 지혈되지 않는 피를 코와 입으로 잔뜩 쏟으며 스스로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수십 년 희로애락을 함께 한 아내가 홀로 우두커니 남겨질 생각을 하니 무척 마음 아프셨을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의 큰 등을 한 번이라도 쓰다듬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세상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안겨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손주들의 환한 미소와 작고 고운 손톱이 하나하나 떠오르셨을 것이다.      


그렇게 떠오른 얼굴들 며느리인  얼굴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없어도 괜찮으니 그저 곁에만 계셨으면 좋겠다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불과 얼마 , 내가 코로나에 걸렸을   안부보다도 아이들의 안부를 먼저 걱정하셔서 너무 서운했는데, 이제 그것도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버님은 나를 처음 만난 날부터 무척 좋아해 주셨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지금  순간  바랄 것이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일산에 올라오신 아버님과 함께 동그랗게 둘러앉아 식사를 함께 했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밥 먹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아주 맛있게 두 그릇을 뚝딱 비우셨다. 나도 마음이 좋았다. 얼굴을 보고 마주 앉아 서로의 젓가락이 오간 접시를 뒤적거리며 함께 반찬을 나눠먹었다. 우리의 일상이 그저 잔잔하게 흐르는 이 젓가락 소리처럼 계속 흘러갈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호되게 코로나를 앓은 온 식구가 끙끙거리며 또 한 터널을 거의 다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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