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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Sep 06. 2021

장화와 피아노

  5살 아들의 어린이집 하원 셔틀버스가 곧 도착할 시간이고, 밖에는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길 위에 만들어져 있을 크고 작은 물 웅덩이를 떠올려본다. 아이를 데리러 나가는 길, 작은 장화를 따로 챙겨 나간다. 아무 불편한 마음 없이 그 물 웅덩이 여기저기를 뛰어다닐 아이의 신나는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가가 찌릿해진다. 물 웅덩이를 피해 조심스럽게 걸어가 보지만 속수무책으로 젖어가는 운동화를 보며 슬퍼하던 한 아이가 생각난다. 어릴 적 나에게 장화는 큰 사치였던 것 같다.


  어린이집 셔틀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를 두 팔로 크게 안아 잘 다녀왔냐고 속삭인다. 멜로디 같은 아이의 대답을 들으며 아이가 신고 있던 운동화를 장화로 갈아 신겨주었다. 조금 추울 수 있지만 우산을 안 써도 좋고 그냥 마음대로 뛰어다녀도 된다고 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길 위의 물 웅덩이들은 이 장난꾸러기 아이의 무자비한 발걸음에 속절없이 당하고 만다.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죄책감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를 보니 내 속의 작은 아이는 저 아이가 너무 부러워졌다.


  "너무 부럽다!!! 엄마는 운동화가 젖을까 봐 못 뛰겠어."


  "그래? 그럼 엄마도 엄마 발에 맞는 장화를 하나 사 신는 게 어때?"


  그 말에 내 속의 작은 아이가 꿈틀거리며 또 눈가가 찌릿하다. 시간이 흘러 이제 장화 한 켤레 사는 것은 나에게 더 이상 사치가 아니다. 그래서 괜찮다. 그런데 괜찮지 않은 게 있다. 그 시절에 나에게 장화 한 켤레 사주지 못했던 부모님의 마음을 동시에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엄마가 된 내 마음이 거기까지 번져서 또 눈가가 찌릿하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이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은 방 두 칸에 작은 마루가 있는 집이었다. 나와 여동생은 그중 한 방을 쓰게 되었는데 우리 둘이 이불을 펴고 누우면 장롱 하나 겨우 서있을 수 있는 좁은 방이었다. 그런 좁은 방에 어느 날 엄마가 장롱을 빼고 큰 피아노 한 대를 들여놓으셨다. 나와 내 동생이 피아노 연주에 딱히 소질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피아노를 사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피아노가 들어오던 날, 방 문짝을 다 떼고 아저씨들이 이리저리 각도를 돌려본 끝에 겨우 피아노가 방에 들어갔던 장면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 피아노는 그렇게 꽤 긴 시간 동안 그 방에서 우리와 함께 지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그 방에서 피아노가 사라졌다. 학교에 다녀와보니 피아노가 없길래 엄마에게 물었더니 그 피아노를 고모네 집에 보냈다고 하셨다. (평소에 별로 피아노를 치지도 않았을 텐데도) 나의 의사를 묻지 않고 그냥 피아노를 보내버린 엄마가 무척 원망스러웠다. 며칠 후, 그 피아노가 떠난 자리에 우리 자매의 책상 두 개가 들어왔다.


  좁은 방에 책상을 놓으려면 피아노를 빼내야 했었으리라. 먹고살기 피곤한 삶 속에서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할 여유가 없었을 부모님의 상황을 이제는 이해한다. 이해하지만 자국에 남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나는 내 아이들에게 최대한 정성 들여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나의 이 모습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이들의 정서에 또 한 자국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게 부모님으로부터 나에게, 그리고 나에게서 나의 아이들에게 관통하는 시간이 마음에 자국을 내며 흘러가고 있다.


  내 결혼식 날 처음부터 끝까지 울기만 했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큰 딸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이렇게 커서 시집을 간다니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우셨다고 했다. 장화 한 켤레 선뜻 사줄 수 없는 팍팍한 삶 속에서도 무리해서 그 큰 피아노를 사주셨고, 그렇게 최선을 다해 우리를 키우셨음을 안다. 그 어느 날의 장맛비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냈을 젊은 날의 부모님께 다가가 뽀송뽀송한 새 신발로 갈아 신겨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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