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에 이름을 주었다. 소로처럼.

이름을 가진 봄꽃은 스스로 생명의 몸짓을 드러낸다.

by 바울리


내가 백개의 혀와 백 개의 입과 쇠로 된 목소리를 가졌다고 해도 이 야생사과들의 온갖 아름다움과 그 모든 이름들을 열거할 수는 없으리.

헨리 데이비드 소로 『야생사과』


VAU04457.jpg 황매화|70mm|1/200s|F2.8|ISO 100



길가에 핀 수많은 종류의 꽃들에게 적절한 이름을 지어주며 한때를 보내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일 것이다. 꽃의 이름을 지을 때 종류와 상관없이 각자의 의미를 담아 지어야 한다면, 떨어진 사과들에 이름을 붙여주던 소로처럼 나의 상상력도 금세 바닥이 날지 모르겠다.


하지만 상상해 보자. 이름이 마음에 든 매화가 뺨을 붉게 물들이며 기쁨의 춤을 추는 모습을, 무심히 스쳐가던 들꽃들 다정히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말이다. 이름을 갖게 된 꽃들은 저마다의 행복을 숨김없이 드러내려 할 것이다.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서로에게 어울리는 존재가 된다.


어쩌면 이름이 생긴 꽃들이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삶을 더 의미 있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꿀벌을 품에 안고 자신의 생명 일부를 기꺼이 나눠 줄 수 있을 정도로 자애롭게 성장한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름을 짓는 행위는 숭고한 목적을 지닌, 내면에 희망을 불어넣는 고귀한 일임이 분명하다. 이름이 생긴 꽃은 더 이상 그저 길가에 핀 꽃이 아니라 이름만큼이나 아름답고 특별한 존재가 된다.



자산홍|50mm|1/800s|F2.8|ISO 100



이름을 붙이겠다는 나름의 소명의식이 생기니, 산책하는 발걸음이 무척 경쾌해졌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다소 경박스러운 느낌이 들어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순간 은은한 꽃향기가 숨 속으로 들어왔고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평온함을 선물한 꽃에게 감사하며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자연이 꽃으로 물들어가는 봄은 실로 아름다운 계절임을 새삼 깨닫는다. 새싹들이 서로 경쟁하듯 새록새록 싹을 틔우며 올라오고 있다. 푸른 하늘과 화사한 햇살, 봄바람은 모든 생명에게 활기를 불어넣는다. 새들은 저마다 아름답게 지저귀며 각자의 목소리로 봄이 왔음을 알리기에 분주하다.


산책로에는 제법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다. 처음 마주한 꽃은 아직 꽃망울을 채 터트리지 않은 순백의 목련이었는데, 새하얀 꽃잎으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우아한 자태가 아름다워 '백조'라고 불러주었다. 이름이 마음에 든다면 아마 며칠 내에 자신의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고 기뻐할 것이다.



VAU03604.jpg 잔디꽃|50mm|1/125s|F2.8|ISO 100



작은 언덕을 넘어가니 손톱만 한 잔디꽃들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잎 하나하나마다 영롱한 보랏빛이 곱게 반짝임을 알 수 있다. 바닷속에 숨겨진 귀한 보석이라도 찾은 기분이 들어서 이번엔 산호초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산호초는 인간과 자연에게 모두 이로운 존재다. 분명 그렇게 자라날 것이다.


꽃 하나하나에 이름을 불러주니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 든다.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매력 있게 느껴진다. 아름다움은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옛 문장이 마음에 와닿는 순간이다. 꽃이든 인간이든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아름다운 꽃이 찬란하게 피어나는 것일 테지.



VAU04365.jpg 목련잎|24mm|1/125s|F2.8|ISO 100


이 나무가 한창 열심히 일할 때는 우리가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아도 그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던 그런 나무였다. 그러나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이 나무가 성숙해지고 그 표시로 뺨을 붉게 물들인다. 그러면 꽤 멀리 떨어진 길을 걷는 무관심한 나그네의 사념은 먼지투성이의 한길로부터 이 나무가 점유하고 있는 담대한 고독의 세계로 옮겨지는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가을의 빛깔들』


한 달이라는 시간, 하지만 꽃에게는 인생의 전부였던 그 긴 시간이 지나면 꽃은 시들고 옅은 흔적만 남겠지만, 나는 이 꽃들이 찬란하게 피어났다는 사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꽃처럼 짧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생을 찬란하게 피우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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