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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추천하는아나운서 Apr 12. 2021

[명작읽기]이방인_알베르카뮈

그 남자의 순수함

1. 오늘의 날씨


비가 오고 우중충한 날씨를 맞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집어 들고 말았다.


그날의 날씨에 맞는 카페가 있고, 서적이 있다.

알베르 카뮈의 책은

오늘 같은 날씨에 왜인지 제격이라고 느껴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작가



2. 주인공 : 뫼르소


주인공(남성) 이름은 뫼르소.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어딘지 이상하다.


어머니 나이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어머니 죽음 앞에서 눈물도 흘리지 않으며, 시신을 앞에 두고 담배를 피우기도 하며, 문지기가 권하는 대로 밀크커피도 마신다.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와서는 바로 다음날 기분에 따라 수영을 하고 바닷가 산책을 하며 여자와 함께 집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추억을 떠올리거나 미래 계획을 세우는 편은 아니다.

그저 현재의 순간순간에 만족할 뿐.

그러다가 살인을 저질렀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3. 스토리라인


해당 책은 총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뫼르소의 삶을 들여다보고, 2부에서는 그런 뫼르소의 삶을 타인의 눈으로 해석한다.



4-1. 그 남자의 성격 : 순수?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이 책은 종이책이 아닌 오디오북으로 처음 듣기 시작했는데, 나는 이 부분을 듣고 바로 껐다. 날씨가 너무 좋은 대낮이었고, 광고주와의 미팅을 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뭐지 이게.. 소설 잘못 고른 거 아니야? 유명한 고전이라며? 아 찝찝한데..'


이전까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소설은 숱하게 들어왔지만, 직접 읽은 것(정확히는 들은... 오디오북이니까..)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책 속 사회의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었나 보다.

(내가 평범한 반응이라는 뜻이라니.. 기분이 별로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에 냉담하고 건조한 반응을 보이는 것.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은 굉장히 이상했고, 이후 이런 그의 태도로 인해 세상은 이상한 낙인을 찍었다. '충분히 살인도 가능한 사람'이라고.



조금 뒤에 마리는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나는 대답했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점심을 준비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 웃어 댔으므로, 나는 키스를 해 주었다.

뫼르소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고, 이를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표현 방식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춰질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사장은 생활이 변한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람이란 결코 생활을 바꿀 수 없고, 어떤 생활이든 비슷비슷하며, 또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에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불만이 가득한 말투로 나는 언제나 질문을 회피하는 대답을 하는 데다가 야심도 없는데, 그런 것은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아주 나쁜 태도라고 했다. 나는 다시 일하려고 자리로 돌아왔다. 사장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으나, 내 생활을 바꿔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학생 때에는 야심도 있었지만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을 때 그런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도리어 주인공 뫼르소가 순수하다고 느꼈다.


자신의 감정을 애써 포장하거나, 이익을 얻기 위해 거짓말하지 않는다. (못하거나.) 그래서 타인들이 만들어놓은 틀에 본인을 넣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타인의 감정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 감정이나 표현들은 그것들대로 이해하려고 한다.


자신만의 확고함과 표현방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통념이 존재하고, 그런 사회통념이 그를 재단한다.


마치 그런 거다.


어느 날 보라색을 좋아한다고 누군가에게 말했더니,

'너 심리상태가 울적하니?'

라는 대답을 듣게 되는.

규격화된 이상한 재단 방식.

(아 물론 나도 농담으로 종종 하는 것 같은데.. 농담인데.. 상처 받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다 ㅜㅜ)


보라색:
우아함/품위/화려/정서불안/우울 등을 묘사한다고 한다
_출처. 색채 용어사전


사회나 타인이 나에게 강요하는 감정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뫼르소는 '누구나 죽을 수 있다'라는 명제를 외치며 덤덤해했다.



4-2. 타인이 보는 그 남자의 성격 : 사이코패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을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쏟아 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잡았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매끈한 권총 자루의 배가 만져졌다. 바로 그 순간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게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버렸고 한낮의 균형, 행복을 느끼던 바닷가의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에 다시 네 발을 쏘았다. 총알은 보이지도 않게 깊이 박혔다. 마치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 같았다.

정확한 이유는 서술되지 않는다.

다소 충동적으로, 뫼르소는 살인을 저지른다.

꽤나 이상한 모양새로.

(변호사는) 어머니가 최근 양로원에서 사망한 사실을 알고 마랭고에 가서 조사를 해 봤는데, 그 결과 내가 엄마의 장례식에서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사실 당신에게 이런 걸 물어보는 게 상당히 거북합니다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내가 답변을 찾아내지 못할 경우 그것이 검사 측에 중요한 반박 자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그는 내가 협력해주기를 원했고 그날 마음이 아팠느냐는 질문을 했다. (중략)

문제는,

그의 살인이 계획 살인으로 해석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원래 감정은 뒷전이고 육체적 욕망이 먼저라고 설명했다. 엄마의 장례식 날도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엄마가 죽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변호사는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중략)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날 내가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했다고 말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니요. 그럴 수는 없죠. 그건 사실이 아니거든요." 내 대답을 들은 그는 혐오스럽다는 듯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변호사)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원망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것,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소용이 없는 일이었고 귀찮기도 해서 단념하고 말았다.


그런 얘기를 들었다. 재판장에서 결과를 받을 때는 모든 것이 영향을 끼친다고. 현재 그 사람의 직업, 주위 평판, 현장에서의 태도 등등. 결국 타인의 잣대다.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니까.


하지만 이건 어떨까. 남과 다른 태도로 인한 오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태도가 냉담했다는 것으로 인해 뫼르소는 이번 살인이 '계획적 살인'이라는 추측까지 받게 된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몇몇 다른 현상으로 인해서 그 사람을 멋대로 판단해버린적은 없을까.


결국 뫼르소는 말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단념한다. 어차피 그들은 듣지 않을 것이기에. 상대방이 나를 이미 멋대로 판단해버렸음을 느꼈을 때, 종종 그러하는 듯하다. '그래, 또 그러라지. 너도 내 사람이 아닌 거지.'



5. 당신의 확신은...


볼 때는 내가 빈 손인 듯 보이지만 내게는 확신이라는 게 있다. 나 자신에 대한 것,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도 있다. 내 인생과 닥쳐올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다.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게 나를 붙들고 있는 한 나도 그것을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을 것이다. (중략)


아무도, 그 누구도 엄마의 죽음에 눈물을 흘릴 권리는 없다. 나 역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모든 고통을 씻어주고 희망을 없애 버리기나 한 듯 온갖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가 가진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이 열린 것이다.

자신의 삶에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내 꿈과, 내 철학과, 내 방식에 대해.


뫼르소는 많은 것들이 모호하고 흔들리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붙잡아줄 수 있는 것은 확신, 그 확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했다.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에서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자신의 모든 것을 '정확한 언어'로 말할 수 없으면 가짜다.


독서를 좋아해. -> 왜?

하얀색을 좋아해 -> 왜?

일찍 일어나는 게 좋아 -> 왜?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 많이 던지고 많은 대답(정확한 언어의 대답)을 가질수록 확신은 강해질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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