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보수와 어떻게 다르며, 진보정치는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고 하는 것인가?
이 책에서 다루는 다섯 번째 질문이다.
01. 인간은 모두 보수적이다 - 베블런
(그러고 보니 시사상식책에서 접했던 그분이 아니던가. '베블런 효과'. 과시 소비에 대해 얘기하신 분..)
"인간이 만든 제도와 인간 특성에서 일어나는 진보는 최적의 사유 습성이 자연선택되는 과정이다."
제도주의 경제학파의 창시자, 소스타인 베블런.
그는 사회 진보란 생물의 진화와 마찬가지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자연적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어디에 살든지 간에 어떠한 제도 속에서 살게 된다. 제도는 그 제도가 만들어진 시기에 사회를 지배했던 정신적 태도를 표현한다. 그러니까 지금 존재하는 모든 제도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 어느 시기에 사회를 지배했던 관점과 사유 습성을 표현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 제도 속에 살면서 과거로부터 전승된 정신적 태도에 따라 사유하는 습성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삶의 환경은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끊임없이 현실에 더 적합한 관점과 사고방식을 요구한다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회의 질서를 위해 마련된 것이 '제도'인데,
결국엔 과거의 사람들이 과거의 시점을 기준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진보하는 사회 속에서 그 '제도'는 언제나 '과거의 것'이라는 것.
베블런의 주장에 의하면, 과거의 지배적 사유 습성이 만든 제도가 그대로 존재할 경우 필연적으로 과거와 현재 사이의 불일치와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제도를 조정하라는 요구가 제기되고 조정이 실제로 이뤄진다.
이러한 과정은 사회가 존속하는 한 무한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베블런에게 '진보'란 '불가피한 진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진보란 피할 수도 멈출 수도 없다.
조선시대에는 사농공상과 남존여비라는 신분제도와 관습이 있었고, 군주의 권력은 장자상속의 원칙에 따라 대물림했다. 양반의 자녀는 양반으로, 노비의 자녀는 노비로 살아야 했다. 남자는 여러 여자를 배우자로 들일 수 있었지만 남편을 잃은 여자는 재혼을 할 수 없었다. 정실부인이 아닌 배우자가 낳은 자녀는 차별을 받았다. 이러한 제도는 제도가 만들어질 당시의 사람들, 특히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가졌던 사유 습성의 산물이다.
한때는 모두가 이런 제도를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적응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안팎의 생활환경이 변화하자 점차 많은 사람들이 이 제도들을 비판하고 거부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지배적 사유 습성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7장 중 (p.206)
19세기 말이 되자 삶의 환경 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사유 습성이 낡은 제도에 대한 항전을 선포했다. 1884년 김옥균이 이끈 갑신정변 주체들이 제출한 14개 조 혁신 정강에는 '문벌 폐지와 백성의 평등권'이라는 요구가 등장했다. 일본 침략에 맞섰던 갑오농민전쟁의 주역은 봉건제도 그 자체를 공격하고 나섰다.
이런 도전이 모두 실패로 끝난 탓에 낡은 제도를 그대로 유지했던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고방식은 3.1 운동과 항일투쟁으로 힘을 길렀고,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반도 최초의 '공화국'을 선포한 임시헌장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획득했다.
제도의 교체는 낡은 사유 습성이 지배적인 지위를 잃고 새로운 사유 습성이 그 자리를 차지할 때 현실이 된다.
왕조국가 조선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판이한 제도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제도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지배적 사유 습성의 차이였다.
-국가란 무엇인가 7장 중 (p.207)
진보와 보수는 사유 습성과 생활방식, 제도의 변화에 대응하는 정신적 태도를 가리킨다.
진보는 생활환경의 변화가 요구하는 새로운 방식, 그에 따르는 제도 조정 필요성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려는 태도이며,
보수는 익숙한 것을 지키려 하다 보니 변화를 거부하게 되는 태도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정신적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일까?
베블런의 이론에 따르면 생활환경의 변화에 강하게 노출되는 사람이 먼저 새로운 사유 습성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러한 변화가 몰고 온 충격이 모든 개인에게 똑같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어떤 환경의 변화를 긴급한 상황으로 인식한 사람은 새로운 방식을 신속하게 받아들인다. 즉,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는 기존의 것을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서 보수주의가 기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의 변화에 강요당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영원히 보수주의자로 살아갈 것이다. 보수주의는 특정한 계급의 독점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다.
유한계급(Leisure Class):
마르크스가 부르주아지라고 불렀던 자본가 계급을 포함해 문명의 모든 시대를 지배했던 계급에게 베블런이 붙인 이름. 생산적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생산적 노동이 창출한 것을 약탈하고 활용한다.
유한계급은 보수주의의 몸통이다. 그러나 그들이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목적만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사유 습성과 생활양식을 바꾸고 조정하는 작업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유한계급은 돈과 권력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아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다. 어지간한 생활환경의 변화에는 압력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현존하는 제도와 지배적 생활양식은 모두 좋고, 옳고 합당하고, 아름답다고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보수주의는 고상하고 품위 있으나 혁신은 천박하고 나쁘다.
전통적으로 유한계급은 정치, 종교, 전쟁, 스포츠 분야에 종사한다.
재벌 총수와 그 가족들, 기업 경영자와 임원들 대학교수, 큰 신문사와 방송사의 간부들이 대체로 보수적이라는 사실 역시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한계급과는 아무 관계없는 하위 소득계층 유권자들이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베블런의 이론에 따르면 그것 역시 유한계급제도와 관계가 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때문이다.
생산적 노동을 하지 않는데도 돈이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생산적 노동을 하면서도 몹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음을 의미한다.
베블런은 그 둘이 약탈하고 약탈당하는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유한계급은 부유하기 때문에 혁신을 거부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한 나머지 혁신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이다.
기존의 사유 습성을 바꾸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며 상당한 정신적 노력을 요구한다. 지배적 생활양식에 순종하면서 일상적 생존투쟁을 견뎌 재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 과업을 수행하기 어렵다.
풍요로운 사람들은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느낄 기회가 적어서 보수적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인 것이다.
생활환경 변화에 적당한 압력을 느끼면서도 학습하고 사유할 여유가 있는 중산층이 가장 뚜렷한 진보주의 성향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실 궁금했다.
부자는커녕 하루 벌어먹고살기도 힘들어 보이는 그들이 왜 보수주의자가 되기를 자청하는 것인지. 왜 보수당들을 지지하는 것인지.
그래서 추측했다.
'몰라서'일 것이라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지 못해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난 철저히 틀렸다. 책을 읽으면서 끄덕였다.
그들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었다. 당장 내일을 걱정해야 하니까.
우리 집은 전형적인 중산층이다. 재벌은 아니지만 당장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할 정도로 여유가 없지는 않다.
그러다 보니 상황을 보고 사유할 여유 정도는 생겼던 것이다.
갑자기 부끄러웠다. 아는 척을 했던 내 모습이.
젊은이들은 기존의 제도와 사유 습성에 노출된 기간이 짧다. 그러나 지적 활동은 왕성하다. 기존의 사유 습성에 대한 집착이 덜하고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가 풍부한 셈이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그 반대가 된다.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은 불가피한 생물학적 필연이다.
한때 진보의 기수였던 이른바 '386세대'도 '486'이 되고 '586'이 되면서 상대적 보수화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 진보 성향의 정당을 지지하는 30대 유권자들도 30년 후에는 보수정당을 더 많이 지지하게 될 것이다. 기성의 모든 권위와 관습을 거부하고 부정하면서 전후 독일 사회를 벌컥 뒤집어놓았던 독일 '68 혁명 세대'도 이제 보수 신문을 구독하고 벤츠 승용차를 즐겨 모는 중장년 시민이 되었다.
저자는 반복해서 진보주의자로 남는 것은 운명과 본능을 거스르는 것, 다시 말해서 너무도 어려운 일이라고 언급한다.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보수주의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진보주의는 목적의식적 지향이다. 보수가 구심력이라면 진보는 원심력이다.
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공존하기에 유지되고 발전한다.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둘이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한다.
진보주의는 새로운 사유 습성을 창조해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운동이다. 진보는 본능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 쉽게 단결하지 못하며 쉽게 무너진다. 진보는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다. 열정과 신념이 무너지면 바람에 날리고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된다. 평생 진보주의자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의 첫 페이지에는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에게'라는 문구가 있었다. 결국 이걸 말하는 것이었나 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현재 시점에서 자기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할까 어떨까?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정말 힘들었구나.'
02.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 - 김상봉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진보란 무엇일까
가장 좁은 의미의 진보는 ;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
가장 넓은 의미의 진보는; 인간 능력의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 것
그리고 둘 사이 어디엔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진보라는 견해가 있다.
"진보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김상봉 교수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진보주의는 이미 죽었다.' 19세기 이후 유럽 진보정당의 대의는 자본주의 극복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대의를 추구하는 국가나 정당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 진보정당의 본래 과제인 반자본주의 투쟁은 한 번도 진보정치의 중심적 의제가 되지 못했다. 자칭 진보정당들도 더 이상 자본주의 전복을 꿈꾸지 않는다. 이렇게 자본을 민주적 통제 아래 둔다는 김상봉의 의견을 저자는 아래와 같이 해석했다.
'진보는 곧 사회주의다.'
03.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 - 이남곡
역사가 에드워드 H. 카는 진보란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의미의 진보가 이성적 존재인 인간의 본질이라고 믿었다. 진보는 단순히 생활환경의 변화가 강제하는 정신적 적응과정이 아니다. 인간은 과거 여러 세대의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사고의 효율성을 확대한다. 이것이 사회진보의 토대이다. 그리고 사회진보는 현존하는 제도를 조금씩 개선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이성의 이름으로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하는 인간의 대담한 결의를 통해서 이뤄진다. -국가란 무엇인가 7장 중 (p.216)
카의 진보 개념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범위가 너무 넓다는 단점이 있다.
이남곡 선생('진보를 연찬하다')의 의견에 따르면 '진보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나가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을 지향하는 게 진보주의이다.
[인간의 자유를 옭아매는 것 3가지]
1. 불합리한 제도
진보는 첫째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2. 물질의 결핍
자유는 물질의 절대적 결핍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생산력 발전이다. 자유는 물질의 절대적 결핍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숨 쉬지 못한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발전도 진보에 큰 기여를 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3. 낡은 생각
셋째는 인간의 의식을 변혁하는 것이다. 타인과 자연을 침범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에게 먼저 양보하고 싶어 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과학, 여성운동, 종교도 진보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저자는 이남곡의 견해가 진보와 진보주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 '중용적'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진보는 현재 자신의 사유 습성과 생활양식을 객관적으로 보고 그것과 환경의 변화 사이의 불일치나 부조화를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생각이 막히고 닫히는 순간, 기존의 사유 습성에 갇히는 순간 그 사람은 진보와 멀어진다. 진보주의 운동에는 당연히 정치가 포함된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불합리한 제도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로 살면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하려면 국가의 기능과 작동방식을 그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정치다.
정치를 통해 진보적 지향을 실현하는 것이 진보정치다
자, 그럼 정치란 무엇인가?
저자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견해를 적절한 답변으로 채택한다.
정치란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 운영에 영향을 끼치는 활동
-막스 베버
정치를 논의하면 반드시 국가와 마주치게 된다. 따라서 진보정치를 하려면 그 나름의 확실한 국가론이 있어야 한다. 사회혁명을 진보주의의 유일한 목표라고 생각하는 경우, 민주적 절차에 입각해 전개하는 현실의 정치는 별로 의미가 없다.
저자는 이 장의 마지막에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문장을 옮기며 깊은 공감을 표한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진작에 더 도움이 되며
더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
04. 국가의 텔로스는 정의 - 아리스토텔레스
목적론적 사고방식의 핵심: "자연은 목적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믿음
목적론에 따르면 만물에는 다 고유의 목적이 있으며 당연히 국가에도 그 본연의 목적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국가의 목적은 으뜸가는 선을 훌륭하게 추구하는 것이다. 모든 공동체는 선을 실현하기 위해 구성된다.
모든 공동체 중에서도 으뜸가며 다른 공동체를 모두 포괄하는 공동체야말로 분명 으뜸가는 선을 가장 훌륭하게 추구할 것이다.
국가 또는 국가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다.
텔로스를 실현한 국가,
충분히 발전해 최선의 상태에 도달한 국가는 과연 어떤 국가일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최선의 국가는 행복하고 잘 나가는 국가이다. 그런데 훌륭한 행위를 하지 않고는 잘 나갈 수 없으며, 개인이든 국가든 탁월하고 지혜롭지 않고서는 훌륭한 행위를 할 수 없다. 용기, 정의, 지혜, 절제와 같은 탁월함은 국가든 개인이든 같은 효력과 성격을 지닌다. 국가의 행복과 개인의 행복은 같은 것이다. 최선의 정체는 누구나 가장 훌륭하게 행동할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제도여야 한다. 훌륭한 입법자가 할 일은 국가나 민족이나 공동체가 어떻게 훌륭한 삶과 행복에 참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의 국가를 만들어 국가의 텔로스를 실현하는 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시민 각자가 훌륭해지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국가가 훌륭해지려면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훌륭해야 한다. 각자가 훌륭하면 전체도 훌륭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약간의 톨스토이 냄새가 났다... 이 얘기를 톨스토이가 들었더라면 매우 좋아했겠네. 톨스토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좋아했던 것인가...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의 민주주의는 지금의 민주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시대적 배경의 차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훌륭한 국가, 선을 행하는 국가,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원한 것과는 달리, 소로는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고 개인을 한 이웃으로 존경할 줄 아는 국가'를 원했다. 그런 국가는 어떤 시민이 국가에 대해 초연하며 국가에 대해 참견하지도 않고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더라도 이웃과 동포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한 국가의 안녕을 해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질문,
진보정치는 무엇인가? 진보정치는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고 하는가?
저자의 답은 다음과 같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는 활동이다.
직접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줌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진보정치의 목표이다.
05. 보론- 복지국가론
복지국가: 선을 행하는 국가의 한 형태, 또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의 조합.
마르크스주의 국가론과의 분명한 결별이자 진보정치세력의 사상적 실천적 발전을 반영.
스위스 로잔대학교 프랑수아 자비에 메렝 교수에 따르면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복지국가는 "사회적 연대의 기능을 독점하는 국가"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출산, 육아, 교육, 취업, 보건, 노후 등 시민들이 혼자 힘만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과제들을 해결하고 갖가지 사회적 위험에 대비하는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복지국가이다. 그러나 이 기능을 완전히 독점하는 복지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와 시민들이 함께 나누어 수행한다. 복지정책이 상당히 발달한 유럽 산업국가들은 점진적으로 국가의 몫을 늘림으로써 복지국가라는 이상에 접근해왔다.
복지국가의 주요 기능
1. 국가의 규제를 통해 일정한 수준에서 시민들을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것
개인 또는 가족에게 노동의 시장가치나 재산 수준과 관계없이 최저소득을 보장.
2. 조세징수와 보조금 지급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일.
질병과 노령, 실업 등 개인과 가족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에 대한 불안을 줄임
3. 시장 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와 공동장비를 국민에게 제공하는 것
복지국가는 조직화된 권력으로 시장 법칙을 세 방향에서 수정한다. 계급적 귀속이나 사회적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시민에게 일정한 수준의 사회적 서비스를 보장.
여기서 저자는 주의사항을 밝힌다.
복지국가론은 '진보주의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복지국가론과 마르크스]
마르크스도 <공산당 선언> 2장에서 "생산방식 전체의 변혁을 위한 불가피한 수단"으로,
"발전한 국가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정책을 제시했다.
그중에는 고율의 누진세, 국립은행을 통한 신용의 국가 집중, 아동에 대한 보편적 공공무상교육, 아동노동 폐지 등이 포함되어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7장 중 (p.228)
[복지국가론과 홉스]
국가주의 학자인 홉스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 홉스는 국가의 목적을 인민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는 것 하나로 규정했다. 그러나 인민의 안전을 더 넓게 해석하면 그의 국가론도 복지국가론과 전면 배치되지는 않는다.
홉스는 '국가는 시민을 보호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빈곤, 실업, 질병, 산업재해, 소득 없는 노령, 시장 거래를 통한 경제적 강자의 착취 등의 사회적 위험이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현실 속에서 국가는 시민을 지켜야 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7장 중 (p.229)
[역사 속에서의 사례]
국가주의의 화신으로 알려진 독일 제2제국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80년대에 독일 복지정책의 주춧돌을 놓았다.
그는 기업인과 관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법정노동시간 제한과 일요 휴무, 아동노동 제한을 비롯한 노동시장 규제를 도입했으며 산재보험과 노후연금, 고용보험 같은 사회보험법을 세계 최초로 정했다.
한편으로는 '공공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사회민주주의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사회주의자 탄압법)을 만들어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을 탄압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사회복지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민중의 삶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국가란 무엇인가 7장 중 (p.229)
[우리나라에서의 사례]
최초의 국민건강보험과 산재보험을 도입한 사람은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뒤 유신체제를 만들어 영구집권을 시도했던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국민연금은 전두환 정권이 기획해 노태우 정부 때 도입했다.
고용보험을 대폭 확대한 것은 김영삼 정부였다.
이런 토대가 있었기에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국민연금을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확대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새로 도입할 수 있었다.
-국가란 무엇인가 7장 중 (p.230)
그리고 저자는 반복해서 강조한다.
복지국가론은 진보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진보주의자만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지국가론이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 또는 이데올로기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내세우게 되면 오히려 복지정책에 대한 국민의 호감과 수용성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소위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 논쟁은 소모적인 '허위 논쟁'이다.
복지정책은 사회적 연대를 통해 시민의 삶을 보호하려는 수단이다. 그 위험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가에 따라 정책수단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회는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서비스 둘 모두를 요구한다.
사회적 연대를 구현하는 복지정책
1. 사회보험
우리나라는 '국민건강보험/노인장기요양보험/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업재해보상보험' 이 다섯 가지 사회보험을 통해 질병, 고령, 실업, 산업재해와 같은 사회적 위험에서 국민을 보호한다.
국민연금은 장기 재정 안정성에 문제가 있고, 국민건강보험은 보장율이 너무 낮으며, 고용보험도 비정규직과 소규모 사업장에 사각지대가 있고, 장기요양보험은 아직 규모가 너무 작아서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사회보험은 국가가 재정을 지원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든 시민들이 가입해 소득에 비례하여 책정되는 보험료를 납부하고 필요한 혜택을 누린다는 면에서 시민들 사이의 수평적 연대를 실현하는 제도다.
2. 공적 부조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고 선언한 헌법 제34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조항은 어떤 국민이든 소득과 재산이 적어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지 못할 경우, 그 원인이나 책임소재를 가리지 않고 공동체의 지원을 요청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적 부조 제도는 김대중 대통령이 도입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국가의 시혜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다.
3. 보편 서비스
어떤 정책 수요를 가진 부모 모두에게 국가가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의무교육: 중학생까지 부모의 재산과 소득을 따지지 않고 모든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교육
기초노령연금: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지급하는 연금
<무상급식 vs 부자급식>
학교급식을 둘러싼 소위 '무상급식'과 '부자급식'논쟁은 학생들에게 점심밥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어디까지 확대할 것인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정치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국가는 헌법에 따라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부유층 자녀라고 해서 따로 수업료를 받지 않는다. 이런 것이 보편 서비스다. 학교급식도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다. 국가가 빈곤가정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의 급식비를 부담하면 공적 부조에서 보편 서비스로 넘어간다.
'부자급식'이라는 반박은 적절하지 않다. 학교 급식을 보편 서비스로 제공할 때, 그 비용은 국가재정에서 나온다. 국가재정의 원천은 국민이 내는 세금이다. 소득과 재산이 많은 부유층은 소득이 많을수록 세율이 높아지는 직접세를 많이 낸다. 소득이 적은 국민들은 소득세를 면제받지만 부가가치세와 유류세 등 소득이 적을수록 세율이 높아지는 간접세를 많이 납부한다. 국세 수입 중에서 직접세와 간접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비슷하다. 국민들은 자녀의 학교급식비를 이미 납부하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보편적 학교급식 서비스를 '부자급식'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세금을 많이 낸 것을 공동체에 대한 기여가 아니라 사회적 징벌의 대상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일이다. 더 많이 발전한 복지국가일수록 더 많은 서비스를 모든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제공한다.
이 책은 2017년 1월 23일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그리고 작년(2018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11월, 2019년(당시 기준 다음 해) 초등학교와 중학교 무상급식이 확정되었고, 2019년 2학기부터는 고등학교 3학년도 제공되며, 차차 확대해나갈 계획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급하게 수립된 민주주의라 골격이 약하다.', '진정한 보수도 진정한 진보도 없어서 제대로 된 정치가 되질 않는다.'
이런저런 말이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조금씩 진보하고 있나 보다. 그리고 그 안의 국민들도.
정리
진보주의자: 가능한 한 많은 서비스를 국가가 제공하기를. 가능한 한 많은 서비스를 보편적으로 제공할 것을 요구. 시민들의 훌륭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일에 국가가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음.
자유주의자: 개인의 자유와 삶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함.
보수자유주의자: 작은 정부를 선호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의 책임을 더 중시한다.
진보자유주의자: 자유주의자와 보수자유주의자의 사이. 그 사이에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책임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내 인생은 내가 설계하고 내가 책임진다. 대신 국가는 국가가 할 일을 제대로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