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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추천하는아나운서 May 03. 2019

4. 혁명주의냐 개량주의냐.

국가란 무엇인가_네 번째 질문

• 제6장. 혁명이냐 개량이냐


이 책의 4번째 질문,

혁명주의와 개량주의, 어느 것이 효과적인가? 어느 것이 옳은 길인가?



먼저, 정의.
혁명이란 '국가권력을 전복하고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혁명 중에서 낡은 국가권력이 발 딛고 있던 사회의 기본 질서를 바꾸는 혁명이 사회혁명이다.


마르크스는 사회혁명이 때가 되어 조건이 무르익으면 반드시 일어난다고 보았다. 100도가 되면 물이 끓는 것처럼.

그러나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를 타도한 사회주의 혁명은 고도로 발전한 산업국가가 아닌 러시아와 중국과 같이 발전이 뒤처진 농업국가에서 일어났다는 것. 그에 대한 이유로 모든 국가의 모든 폭력이 같지 않다는 것을 들었다.


독재체제의 국가폭력은 지배집단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주민에 '대해서'행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의 국가폭력은 주민을 '위해서', 사회 자체를 방어하기 위해서 행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되면 누구도 국가폭력에 맞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국가가 계급 지배의 도구가 아니라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한, 인민들은 국가폭력에 대항하거나 국가를 전복하는 사회혁명에 나서지 않는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의견과는 달, 발전한 산업국가에서 사회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다. 영국, 프스, 미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를 단순한 계급 지배의 도구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2016년 7월에 당선된 필리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마약 소탕 전쟁'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취임 직후 반년 동안 무려 6000명의 마약범죄 혐의자를 재판절차 없이 처형하고 4만 명 이상을 체포했다.
6000명 가운데 경찰이 죽인 것은 2000여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자경단을 자처하는 민간조직이 죽였다. 두테르테는 마약을 근절하기 위해 앞으로도 몇 만 명을 더 죽일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국제 인권단체가 인권유린이라고 비난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여론조사기관들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필리핀 국민들은 두테르테의 마약 소탕 전쟁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맥락이다.
마약과 관련이 없는 다수의 국민들은 '나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두테르테 정부가 폭력을 행사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혁명은 언제 일어날까.



라스키는 사람들이 국가에 복종하는 이유에 대해 얘기했다.

사회가 추구하는 여러 가지 목표가 가져다주는 혜택이 그가 싫어하는 어떤 것의 폐해보다 더 크다고 생각할 경우,  그 강제가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 사람은 강제에 도전할 권리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국가가 그와 반대로 행동할 때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국가가 명분 있게 복종을 요구하면 시민은 복종한다.

명분시민들의 욕망을 최대한으로 충족하려는 국가의 의지와 능력이다. 국가의 노력이 사회의 어떤 특정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는 쪽으로 심각하게 편향되어 있으면 조만간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혁명의 가능성을 현실로 전환하는 조건은 무엇이 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면, 머지않아 사회혁명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1. 사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그 사실을 민중이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어날 희망이 없는데 특정한 사람들 반칙으로 부를 축적하고 부당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믿을 때, 정의가 짓밟히고 불의가 횡행하는 세상이 확 뒤집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 혁명의 첫 번째 조건이 갖춰진다.


2. 민중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회에 아무리 큰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다는 확신이 널리 퍼져 있을 경우에는 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 지배자의 성의를 더는 믿을 수 없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었을 때 폭력사태가 찾아온다.


3. 앞의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폭력이 아닌 다른 모든 수단을 남김없이 행사했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받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민주주의 국가에는 국가를 비판할 자유가 있다. 마지막 수단인 폭력 행사가 대중의 승인을 받으려면, 폭력에 기대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행동 방안이 다 사용되었으며 다른 방법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덧붙인다. 이런 조건들이 갖춰졌다고 해서 사회혁명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사회혁명이 성공하려면 국가권력이 '썩은 문짝처럼 허약해야'한다.

사회 혁명은 제국의 행정력과 군사력이 무너진 이후에 일어났다. 제국의 행정력과 군사력이 무너지는 데는 지배층의 무능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파탄이나 치욕적인 패전이 큰 역할을 했다. 지배층의 권위와 힘이 혁명 이전에 이미 결정적으로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이 장의 마지막 문단에 저자는 이런 말을 붙여놓았다.

'사회혁명은 사회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사회혁명으로 탄생한 국가는 그 전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된다. 더 능동적인 힘을 발휘한다.' 쇠락한  아니라 더 강력해진다는 것이다.


이 점은 무조건 동의하지 못하겠다. 구체제의 붕괴로 시작된 사회혁명이겠지만, 새로운 체제가 무조건 질적으로 우수할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지?

저자의 의견인지, 인용된 것인지는 따로 표기가 되어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이 문단의 주장에 관해 개인적으로는 전적인 동의를 표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모든 혁명가가 옳은 것이게..



03. 톨스토이의 절망


평화주의자 톨스토이는 사회혁명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는 일하는 사람들이 만든 부가 마치 열이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상층계급 수중에 집중되는 것이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점에서 혁명가들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러나 사회악을 근본적으로 잘라내기 위해 상층계급을 없애자고 한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권력기관이 존재하는 한, 모든 부는 계속해서 권력자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해법을 찾을 수 없던 톨스토이는 결국 종교적 해결책으로 결론을 내렸다. 

너무도 허망한 결론이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각자가 욕망을 줄이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훌륭하게 사는 세상을 원했다. 사람들 사이에 훌륭한 삶이 존재하려면 먼저 사람들이 훌륭해져야 한다. 사람들을 훌륭한 삶으로 인도하는 방법은 스스로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삶을 정착시키는 데 이바지하고자 스스로 수양하며 복음서의 다음 구절을 실천하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톨스토이는 나름 그의 철학과 부합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조국 러시아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과격했던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내전에 휩쓸렸다. 그리고 그 혁명이 낳았던 소비에트 연방은 불과 70년 후에 무너져버린다.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으나, 톨스토이의 이런 결론은 조금 허망하다.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 에덴동산이 지구 상에서 더 이상 현실화될 수 없는 이유, 우리는 알지 않는가?
그의 이런 결론은 결과적으로 '포기했다'라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04. 유토피아적 공학과 점진적 공학 - 포퍼


사회혁명이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에 대해 내가 던졌던 질문에 관한 내용이 이번 페이지에서 언급된다.

사회혁명이 초래한 결과.
고귀한 동기를 가지고 일으킨 혁명이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것.


포퍼는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도모하는 혁명에 '플라톤식 접근법에 입각한 유토피아적 공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플라톤식 접근법: 정치문제에 대한 목적론적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유토피아 주의: 사회악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는, 세상에 품위 있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비위에 거슬리는 사회제도를 완전히 근절해버려야 한다는 확신. --저자는 이를 비타협적 급진주의라고 일컫는다.


포퍼는 유토피아적 공학 말고 '점진적 공학'이라고 그가 이름 붙인 사회 개량의 길이라는 다른 방법이 있다고 주장했다. 추상적인 선을 추구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유토피아 공학은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강력한 중앙집권을 요구하며 독재로 흐르기도 쉽다. 그러나 점진적 공학은 그렇지 않다.


포퍼의 표현에 따르면, 점진적 공학이란 '민주적 간섭주의'다.

그는 19세기 유럽 자본주의 체제가 정의롭지 못하고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극심한 궁핍과 제한 없는 장시간 노동, 폭행과 인권 유린, 유아 노동 같은 사회악이 창궐한 것은 '자유의 역설'때문이라는 견해를 표명한다.


제한되지 않는 자유는 자멸한다.
-포퍼

무제한의 자유

이는 다시 말해서, 강자가 약자를 위협하여 약자의 자유를 강탈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법은 만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범위만큼 국가는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포퍼는 자본가와 부자들이 경제적 약자의 자유를 강탈하고 불평등한 관계를 강요하는 것을 방치하는 일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팽개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국가는 어떻게 간섭해야할까.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는 제도적 간섭이다. 

단결권을 비롯한 노동 3권 보장, 해고 보호, 유아 노동 금지와 모성 보호, 산업안전과 산업보건을 위한 규제, 법정노동시간 제한, 최저임금제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시간에 대한 국가 규제가 모두 이 제도적 간섭에 포함된다.


둘째는 대인적, 직접적 방법이다.

통치자가 설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권력기관을 동원해 어떤 범위 내에서 조처를 취하는 것이다. 민주적 간섭주의는 언제나 제도적 방법을 우선적으로 택하며, 이것이 부적합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직접적 방법을 사용할 것을 강조한다.


포퍼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유토피아저 공학'을 도덕적으로 비난한 게 아니다. 그가 사회혁명을 반대한 이유는, 폭력으로 이상 국가를 시현하려고 하는 것은 혁명가들이 대항해 싸우고자 했던 악보다 더 나쁜 치료법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폭군 치하에서 다른 가능성이 없는 경우에만 폭군 살해와 폭력혁명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혁명의 목적은 오직 민주주의 수립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폭력의 사용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한 폭군 치하에서만 정당하다는 것. 그리고 그 목적은 오로지 하나, 폭력 없이 개혁할 수 있는 상황(=민주주의 수립)을 조성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말이 와 닿았다.
'폭력적 수단으로는 그 이상의 것을 성취할 수 없다.'




다시 개량과 혁명의 양자택일의 문제.


상황에 따라서 개량 즉 포퍼가 주장한 '점진적 공학'의 길이 차단, 봉쇄되어 버리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 혁명의 문이 열린다고 저자는 보았다.

구체적인 악과 싸우는 점진적 공학이 물론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최악의 긴급한 악'으로 인해 숨이 끊어지기 직전 상황에 몰려있는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혁명의 길밖에 없는 것이다.

1894년 조선왕조를 붕괴 위기에 몰아넣었던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에게는 엄격한 신분제도에 기초를 둔 봉건제도를 타파할 어떤 '점진적 공학'도 없었듯이.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현실에서는 민주주의 정치혁명과 급진적 사회혁명, 누구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고.




06. 겁에 질린 자유주의자 - 하이에크


포퍼는 자유주의자였지만 극단적이지 않았다. 

무제한의 자유가 그 자체를 파괴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국가가 '민주적 간섭주의'에 입각해 경제적,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체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철학의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플라톤과 헤겔을 지목하며 엄청난 적대감을 보였다.('열린사회와 그 적들' - 포퍼) 


그러나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국가의 소멸과 자유로운 개인의 자발적 연합체로서의 사회를 소망했다는 점을 들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포퍼와 같지 않았다. 도리어 자유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며, 자유를 제약하려는 모든 시도는 전체주의로 귀착된다는 극단적 이론을 펼친 철학자도 흔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하이에크다. 


포퍼가 전체주의를 혐오했다면 하이에크는 전체주의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에서 하이에크를 '겁에 질린 자유주의자'라고 이름 붙인다.

하이에크의 대표 저에는 '노예의 길'이 있다. 여기서 그는 대공황의 재앙에서 자본주의를 구해냈다고 칭송받은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를 공격한다. 그 이유는 케인즈의 이론이 전체주의로 가는 길을 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이에크가 신봉한 사회운영의 기본 원리는 자연발생적인 힘을 최대한 이용하고 강제력에 최소한으로만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자연발생적인 힘'의 핵심은 "경쟁"이다. 그는 경쟁이 최대한 유익하게 작동하도록 의식적으로 사회체제를 만들어야 하며 수동적으로 제도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다. 그에게 있어서 포퍼가 옹호했던 '민주적 간섭주의'는 경쟁의 작동을 북돋우는 한에서만 정당하다.


하이에크는 또한 냉정한 개인주의자였다.

그는 가치의 척도가 각자의 정신에만 존재하며 다른 일반적 가치 척도는 없다고 보았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공동선'의 개념도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개인주의자란 모든 사람이 타인의 가치나 선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와 선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최고의 선이란 개인의 목적 체계이며, 이것은 다른 그 누구의 그 어떤 지시에도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악 판단 기준은 각자의 내면에 있으며,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게 그의 주장의 골자였다.


하이에크에게 도덕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행동에 관한 현상이었다. 도덕은 개인이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분야에서만, 도덕법의 준수를 위해 개인적 이득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도록 요청되는 분야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집단주의는 도덕을 파괴한다. 개인의 책임을 면제하는 것을 주된 약속으로 내거는 운동은 그 운동 이상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도덕에 반하는 효과를 낼 수밖에 없다. 즉, 사회혁명은 도덕에 위배된다는 뜻이다. 다양성과 개인의 자유를 파괴한 곳에는 도덕이 들어서지 못한다. 이런 체제는 결국 사상의 자유도 파괴한다.


그런 종류의 국가는 모든 사람을 하나의 목적 체계에 봉사하도록 만들고자 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강제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 목적 체계를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믿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스스로 그 신념을 위해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 경우 사람들은 억압받는다고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전체주의 국가는 교육과 언론을 장악하고 통제한다. 


사상의 생명은 서로 다른 지식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다양한 개인들의 상호작용이다. 이성은 그와 같은 차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지금 어떠한 견해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해 모두에게 강요하면 이성은 성장할 수없다. 집단주의 사상은 이성을 숭고한 것으로 만기 위해 출발했지만 이성이 성장하는 과정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이성을 파괴하는 비극으로 끝난다. 지금 가지고 있는 지식을 토대로 사회의 최종 목표를 설계하고, 설계에 들어있지 않거나 충돌하는 다른 견해를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이성의 성장과 정신적 발전이 멈추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흔히 내세우는 공공의 이익이라는 것도 허상에 불과하다고 얘기한다.

하이에크에게 자유는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정치적 이상이다. 시민사회와 개인의 삶에서 각자 최고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대상들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하 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내적 평화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 도구에 불과하다.



포퍼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통해 기회균등을 넘어서는 평등과 정의를 성취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하이에크완전히 차단했다. 민주적 절차에 의해 수립된 권력이라고 할지라도 '공동선' 또는 '일반의 이익'을 명분으로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권력이 자의적이지 않도록 방지해주는 것은 권력의 '원천'이 아니라 권력의'제한'이라는 것이다.

비록 민주적 절차를 통해 어떤 일을 하기로 결정했더라도,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력을 사용할 필요가 있고 확고한 규칙으로 권력의 사용을 제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권력은 틀림없이 자의적이 된다는 것이다.


법의 지배가 효과적이려면 예외 없이 적용되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규칙의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 하이에크는 만약 만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기만 한다면 불합리한 규칙이라도 나쁠 게 없다고 주장했다. 법치가 파괴되면 자유를 지킬 수 없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경제적 불평등을 개선하고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모든 시도를 공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논리적 귀결이 나오기 때문이다.

자유와 경쟁이 필연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과를 미리 예견하고 특정인에게 이익이나 불이익을 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자유를 지키려면 법의 지배를 확고히 수립해야 한다. 하지만 자유와 경쟁이 초래한 불평등을 인위적으로 바로 잡으려는 시도는 반드시 법치를 파괴한다.

-> 법치가 파괴되면 자유를 지킬 수 없다.

-> 만약 부의 분배를 보장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의도적으로 누가 무엇을 가져야 하는지를 결정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경제 전체를 계획해야 한다.

->경제 전체를 계획하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전체주의로 가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ㅇ

분배의 정의라는 하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전체주의를 선택한다면, 전보다 더 큰 불만과 억압 아래 놓이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경쟁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일 하나뿐이다.

오늘날의 '공정거래위원회'하는 일이다.


우월한 시장지배력을 가진 기업이 거래처를 수탈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며, 그 목적은 소비자와 힘이 약한 기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을 보호하고 북돋우는 것이다.


경쟁이 적절하게 작동하기 위한 가장 본질적인 전제는 사기와 기만을 방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국가가 해야 한다. 국가는 그 밖의 다른 어떤 목적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자유사회가 단일 목적에 예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 규칙의 유일한 예외는 전쟁과 재앙이 발생한 경우뿐이다.  저자는 이렇게 어떤 가치 또는 목표를 절대화하여 그것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한 하이에크의 견해적극적인 지지를 표했다. 그러나 하이에크 스스로 자신이 반대하는 일을 했다고 얘기한다. 스스로 논리적 오류에 빠진 것이다.


하이에크는 인간이 사회를 지배하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를 비판했다. '자유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 시장은 자유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국가는 시장을 지배하려 들기보다는 시장의 힘에 순종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했지만 자유라는 이념과 시장이라는 비인격적 힘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한 셈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하이에크가 전체주의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를 자유지상주의 이데올로기의 덫에 가두었다고 말한다. 자유를 절대적으로 우월한 단 하나의 가치로 숭배한 이념의 덫이 그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았던 케인즈의 이론에 대해서까지 전체주의 혐의를 씌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케인즈는 자본주의 체제에 주기적으로 경기변동과 경제공황이 찾아드는 원인을 찾고 대처방법을 제안했다.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과잉생산 공황은 일어날 수 없으며 단지 불균형을 조정하는 데 필요한 일시적인 경기순환이 있을 뿐이라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논리를 케인즈는 거부했다. 케인즈는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국가정책을 통해 경기 변동을 조정하고 경제공황을 예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것을 하이에크는 전체주의와 연관시킨 것이다.


하나의 가치 또는 목표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폭력 사용을 불사하는 사회혁명에 반대하는 하이에크의 견해는 공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유라는 하나의 가치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저자는 자유라는 하나의 가치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와 정의나 평등이라는 단일 가치가 지배하는 다른 전체주의 사회가 어떻게 다른 건지 묻고 싶다며 의아심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에 대해 나도 공감. '자유'에 사로잡혀 잘못된 논리로 빠져버린 듯하다.


저자는 6장의 마지막 장에서 하이에크 이론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설명한다. 세계의 절반이 전체주의 깃발 아래 놓였던 20세기 중반, 공포감에 사로잡혔던 유럽과 미국 자유주의자들의 정서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그들은 국가가 특정적 가치 또는 공동선을 내세워 자의적 개입을 하는 그 순간 사회는 미끄러운 비탈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고 우려했다는 점을 언급한다. 그들이 우려한 비탈 아래에는 전체주의가 있었다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하이에크의 걱정은 그야말로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케인즈주의를 수용했던 어떤 민주주의 국가도 전체주의로 가는 미끄러운 비탈에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혁명의 길과 점진적 개혁의 길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가?"

저자는 이것에 처음부터 잘못 만들어진 질문이라고 얘기한다. 애초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과가 불확실하고 폭력을 동반하는 사회혁명과 위험이 적고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결과가 즉각적,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점진적 개혁의 길 가운데 사회혁명을 선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점진적 개혁의 길이 봉쇄된 곳에서만 사회혁명이 길을 연다. 마르크스가 혁명의 필연성을 얘기했던 것은 당시에 유럽 자본주의 사회가 집단적 궁핍과 소외,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점진적 개혁의 길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하이에크와 포퍼는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저자는 민주주의 문명국가가 걸어야 할 길은 모든 종류의 '사회계획'을 배척하는 하이에크의 길이 아닌 '민주적 개입'을 통해 사회정의를 실현하자고 주장하는 포퍼의 길이라고 얘기한다. 사회혁명으로 흘러가는 흐름을 막고 싶다면 더더욱 부지런히 점진적 개량을 시도해야 하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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