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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해소방안에 대해 논하라

페루에는 수치의 장벽이라고 불리는 기다란 장벽이 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왜 세운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두 마을의 경계에 위치한 이 장벽은 길이가 무려 10km에 달하며 높이는 3m 정도 된다. 따라서 두 마을 사람들은 왕래가 쉽지 않다. '수치의 장벽'이라는 이름은 바로 그런 점에서 유래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두 마을은 각각 부촌과 빈촌이기 때문이다. 부촌 사람들은 그 장벽 근처가 위험하다는 핑계로 더 이상 가까이 가지 않는다. 빈촌 사람들은 수치스럽다는 이유로 근처에 가지 않는다. 그렇게 그 장벽은 시간이 가도 끊임없이 건재하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엔가 곳곳에 수치의 장벽들이 높게 세워졌다. 페루와의 차이를 꼽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해 한 조사기관에서 OECD 국가들을 대상으로 상속 부자 비율을 조사했다. 3위에 해당된 일본은 18%, 2위에 해당된 미국은 28%였던 반면에 1위를 차지한 우리나라는 무려 74%의 높은 비율을 보였다. 더 이상 대한민국에 자수성가란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지역적 양극화는 어떨까. 매년 지역에 청년들이 없다며 우려하지만 현실은 청년과 젊은 부부들이 살기 힘든 환경이다. 서울의 초중등학교에 보건교사가 한 학교당 1-2명씩 배정될 때, 경상북도 양주의 경우는 1명의 보건교사가 4개의 학교를 돌보고 있었다. 청년들이 지역을 떠났다기보다는 일자리도 부족하며 복지도 갖춰져있지 않은 지역이 청년들을 내몰았다고 보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겠다며 새 정부가 들어선지도 2년 차에 접어들었다. 빅토르 위고는 '정의에는 분노가 들어있어서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는 분노만 남게 된다'라고 말했다. 현재의 우리나라는 분노사회다. 갑에게 향해야 할 분노는 그 방향을 잃고, 같은 위치에 있는 을 동료나 혹은 그보다 더 약자인 병, 정에게 향하기도 한다. 제대로 갖춰진 신호등이 없기 때문이다. 새 정부는 이런 무질서한 사회에 개입해 신호등을 켜주어야 한다. 먼저 경제적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 정부는 집, 땅과 같은 불로소득 개념의 재산 소유자에게 높은 세금을 요구해야 한다. 이는 그들이 노력해서 얻어낸 소득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측정되어 있는 종합부동산세(종부세)는 18억 원 상당의 아파트 소유자가 연 100만 원 대의 세금을 내는 것으로, OECD 국가들 중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다. 독일의 경우, 같은 가격의 집 소유자라면 매 달 200만 원 상당의 세금을 내야만 한다. 세금이 워낙 높기 때문에 자신의 집을 꼭 가져야 한다는 관념도 없다. 그러나 세금을 올리는 대신에 정부가 지켜줘야 할 것은 가시적인 복지정책이다. 이를 통해 국민들에게 세금의 쓰임을 보여야만 한다. 동시에 공영방송사들은 정부의 행적을 낱낱이 보여주며 공론장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지역적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먼저 수도권에 집중되어있는 공공기관들을 지역으로 옮겨야 한다. 혹자는 근시안적인 해결책이라고 얘기한다. 어차피 주중에만 근처 지역에서 거주하며, 주말이 되면 수도권으로 다시 올라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시작이다. 주중에 있을 직장인들을 위해서 편의시설들을 조성하고, 그 직장인들의 자녀들을 위해 학교와 유치원들을 세워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둘째최소한 공립학교에 한해서라도 교사와 보건교사의 일정 수를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지역에 거주하며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정책이며 교육정책의 일환이다. 자녀교육 부분이 충족되지 못하면, 그 지역에 오래 있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셋째지역 청년 일자리 제공이다. 지난해부터 '광주형 일자리'가 거론되어왔다. 광주형 일자리란 노동자들의 임금을 현재 대기업 노동자들 임금의 절반 수준(연 4000만 원)으로 낮추되, 복지 수준은 시 차원에서 더 높은 지원을 해주는 정책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역 청년의 일자리를 늘린다는 것이다. 매 해 광주지역을 떠난 주민 중 절반 이상이 취업을 위해 수도권으로 떠난 청년이라고 한다. 이는 비율에 차이는 있지만 타 지역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이 같은 정책은 지역과 청년들 모두를 위해서 더할 나위 없이 필요하다.


지난 2015년, 총 12부작으로 짧게 편성됐던 '송곳'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거기서 노조를 대변하는 노무사가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달리기를 하는 게 아니라 삶을 사는 거고, 우리는 패배한 게 아니라 단지 평범한 겁니다. 우리의 국가는, 우리의 정치 공동체는 평범함을 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학창 시절 누군가는 공부를 더 잘해서 흔히 얘기하는 고시 패스를 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남들보다 유난히 더 예뻐서 TV에 나오는 소수의 로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사업적 마인드가 뛰어나서, 남들이 뛰어들지 않던 시장에 뛰어들어 기가 막힌 성공을 거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다수인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국가는 , 정부는 그런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보호해 줄 의무가 있다. 평범함을 벌주는 게 아니라, 그런 평범함으로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신호등을 켜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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