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국가는 우연과 행운이 아니라 지혜와 윤리적 결단의 산물이다. 국가가 훌륭해지려면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이 훌륭해야 한다. 따라서 시민 각자가 어떻게 해야 스스로가 훌륭해질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아리스토 텔레스
2014년 4월,
언론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언론홍보학과 편입을 준비하던 그 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당시에는 종일 독서실에만 있었다. 그러던 중 그 뉴스를 접하고, 경과를 접하며 문득 허무함과 처참함에 빠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게 다 뭐하는 짓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랄까) 그리고 그때쯤 사람들 사이에서 '기레기'라는 신조어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2016년 10월,
언론홍보학과 4학년 2학기, 취업을 생각해야 하던 그 해, 광화문으로 나갔다.
공중파가 아닌 JTBC를 시작으로, 뉴스에서는 매일같이 현 정권의 국정농단을 입증하는 사실들이 보도되었다.
국가의 사유화와 정부의 오작동이 추측이 아닌 사실이 되어 눈앞에 노출되었다. 크다 싶은 공터에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벌어졌다.
81학번, 84학번인 부모님은 시대가 전혀 변하기 않은 것 같다며 개탄하셨고, 나는 24년 평생에 처음 보는 집회에 어리둥절했다. 이전까지 내가 살던 나라는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기에 배신감이었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어느 순간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있었고,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찼다.
그때 모두가 묻던 질문에 동참했다. '이게 나라인가?'
그리고 또 궁금했다. '이런다고 상황이 변할까?'
이어서 '이런 상황에서도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이유가 뭐지?', '그전에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지?'를 끊임없이 물었다.
그 해 나는 졸업을 한 학기 유예했다.
2017년 3월,
졸업을 앞둔 그 해, 결국 국민들의 촛불은 국회의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냈다.
헌정사상 최초로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에서 만장일치로 탄핵소추안을 인용하였다.
'계란으로 바위가 깨지는구나!'
매일같이 뉴스를 보고 신문을 읽어도 정계 소식은 먼 나라 이야기만 같았는데
내가 참여했던 집회로, 국민의 힘으로, 정권이 교체됐다.
그때 나는 내게 있어서는 첫 공중파 공채 전형을 치르고 있었다. MBC였다. 이어지던 촛불집회로 인해 마음이 안 갔던 탓인지, 매우 가볍게 중도 탈락했다. 그리고 그 해 7월, 광주 CBS에서 첫 방송을 시작했다.
그때 집회에 다녀오는 내게 막내 삼촌이 내게 들려준 말이 있었다.
"국가가 훌륭해지려면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이 훌륭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었다.
나 같은 서민에게는 대통령이 누구든지 국회가 어떤 의원들로 구성되든지 무관한 줄 알았다. 결코 아니었다. 내 표 하나가, 내 촛불 하나가 모여서 무언가를 만들 수 있었다.
2018년 1월,
첫 직장에 들어온 지 6개월 차, 우리나라에서 미투 운동이 시작됐다.
새로운 움직임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퇴사를 결심했다.(물론 6개월은 더 다녔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바위를 깨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마냥 '전달'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무언가 하고 싶었다. 어떠한 '꿈틀'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정규직'이 아닌 신분에서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2019년 1월,
첫 직장을 그만둔 지 6개월 차, 법원은 안태근 전 검사장을 법정 구속했다.
국내에 미투 운동을 본격 발화시켰던 서지현 검사의 폭로 1년 만이었다. 법원이 서 검사에게 성추행, 인사보복을 한 안태근 전 검사장을 엄중히 단죄한 것은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대한 응답으로 읽힌다는 평이 많았다.
"제가 바라는 세상은 미투가 번지는 세상이 아니라 미투가 필요 없는 세상"
"한 사람이 진실을, 정의로움을 얘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서 검사는 지난해 11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국가가 훌륭한 국가일까?
<국가란 무엇인가>의 '초판 서문'에서 저자 유시민은 이 질문에 본인의 답변을 아래와 같이 적었다.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모든 종류의 위험에서 시민을 보호하며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게 행동하는 국가"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국가는 끊임없이 과거에 비해 악을 더 적게, 선을 더 많이 행하는 쪽으로 진화해왔다고 믿는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이것이 문명과 역사와 인간의 진보라고 생각한다고.
특히 '맺음말'에서 언급된 '훌륭한 국가'가 좋았다.
저자는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를 원한다면서, 그가 생각하는 훌륭한 국가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 국민을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중하는 국가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런 국가에서 개인으로 훌륭한 삶을 살려면 우리들 각자는 "먼저 인간이고 그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라고 얘기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시민이어야 한다고.
후불제 민주주의
역사는 귀한 것을 거저 주는 법이 없다. 남들이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 치렀던 희생과 비용을 우리는 민주공화국을 세운 후 오랜 세월 동안 치러야 했다. 우리는 왕을 내쫓고 신분제도를 뒤엎는 민주주의 혁명을 한 적이 없다는 것.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민주공화국을 세운 다음에야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배우고 경험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저자는 '후불제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4.19 혁명에서 스러졌던 청년 학생들, 유신시대에 목숨을 잃거나 옥고를 치렀던 대학생과 지식인 종교인들, 5.18 광주 민주항쟁 희생자들,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 최루탄과 경찰봉에 맞섰던 시민들, 광우병 촛불 시위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요구 촛불시위에 나섰던 시민들, 그들이 쏟았던 수고와 희생은 모두 우리가 처음 민주공화국을 세울 때 미리 치르지 않았던 비용을 후불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덧. 대화의 희열 2 후기
KBS2 <대화의 희열 2> - 유시민 편
이 책을 잡고 있던 중에 '<대화의 희열 2>-유시민 편'을 시청했다. 거의 마지막 페이지를 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책을 읽고 있던 중에 저자의 이야기를 듣게 된 셈이었는데,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내가 읽고 있는 책 속의 저자와 일치하는 사람임을 강하게 느꼈다. 좋은 부분이 정말 많았는데, 그 점이 내게는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다.
'일관된 사람이구나.'
취준생으로서 면접을 준비하다 보면 듣게 되는 얘기가 있다. '자기소개서에서 보이는 캐릭터와 면접에서 보이는 캐릭터를 동일하게 할 것' 탈피가 생기는 순간 탈락이라는 것이다. 사실 꾸며낸 것이라면 쉽게 탈피가 생겨난다.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는 조금 슬픈데, 자신의 캐릭터를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다. 갈피를 못 잡았으니 이도 저도 아닌 게 되는 것이다. 전자나 후자나 매력이 없어 보이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어찌 됐든 해당 저자가 이 책을 쓸 때 그저 조사를 열심히 해서 마냥 잘 쓰기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녹여서 써 내려간 것이었나 보다 싶었다. <대화의 희열 2> 유시민 편에서 그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는 책을 읽고 있던 내가 책 속에서 만난 유시민과 정확히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은 더 와 닿았다. 정확히 말하면 신뢰가 갔다.
앞서 읽었던 <브랜드가 되어간다는 것>에서 신뢰를 얻기 위한 조건을 언급한 부분이 있었다.'성품, 역량, 결과'가 필요하다고 했다.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해당분야에 대한 역량이 있어야 하며, 결과를 보여주고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적어도 그는 일관성을 보였다는 부분에서 그를 증명한 셈이었다. 사실 웬만해서 TV에 나와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그들이 보이는 캐릭터를 믿는 편이 아니다. 만들어진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더 많다. 그런데 어쩌면 매우 사소한 부분, 그의 글과 말의 일관성이 나로 하여금 신뢰를 갖게 만든다는 점이 스스로도 신기했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