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문]2018 MBC 기출
“윤하야, 짐 다 챙겼지?”
여행이 아니다. 이사다. 유년 시절, 11번의 이사를 했다. 유치원은 3곳을 다녔고, 초등학교는 4곳을 다녔다. 하지만 너무도 적응을 잘했던 걸까. 부모님은 당신들의 딸이 이토록 잦은 전학을 겪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셨다. 최근에 와서 가끔 과거 얘기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동생이 초등학교 입학을 했던 날도 이사를 한 날이었다. 온 가족은 동생을 챙겨야 했다. 4학년 된 나는, 세 번째 초등학교에서 스스로 전학 절차를 밟고 반을 찾아야만 했다.
항상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늘 하는 고민이 있었다. 새롭게 마주하는 수많은 인연들에게 ‘어떻게 나에 대한 기억을 남길지’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무언가 나에 대한 흔적을 남기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SNS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에 만났던 아이들이었다. ‘이메일 주소 만들어오기’가 숙제였던 시절이었다.
먼저 나에 대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 장르별로 한 가지의 음식만 좋아하기로 했다. 분식에서는 떡볶이였고, 아이스크림 중에서는 ‘앤초’였다. 과자 중에서는 ‘초콜릿’이었다. 그중에서도 ‘페로로 로쉐’를 제일 좋아했다. 뭔가에 특별하면 사람들은 기억하는 것 같았다. 음식에 나에 대한 추억을 담길 바랐다. 절대 ‘아무거나’는 없었다. ‘아무거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의도적이었지만 이후에는 실제 내 취향이 되었다. 이제 주변 사람들은 떡볶이 맛집이 궁금하면 내게 묻는다. 예쁜 초콜릿을 보고 생각났다며 선물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다음은 누군가의 영원한 팬이 되는 것이었다. 한때, ‘경덕초등학교 베이비복스’를 결성했더랬다. 그 시절, 학예회를 포함해서 무대가 있는 모든 곳은 우리가 주인공이었다. 그만큼 그 밖에서는 열심히 좋아하고 연습했다. 공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한 뒤,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다녔다. 스피커가 달린 워크맨을 가지고 와서 노래를 틀고 춤 연습을 하기도 했다.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경덕초등학교 베이비복스’의 맥은 끊기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노래방에서만큼은 기억되는 내 애창곡들로 남았다.
이러한 것은 중요했다. 그런 한 가지를 통해서 남들에게 내가 기억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떡볶이’를 떠올릴 때면 내가 함께 생각난다는 이들이 생겨났다. 자주 가는 브랜드 떡볶이집, <두끼>를 가면 더더욱 생각난다고 했다. 베이비복스의 노랫소리가 들리면 알려주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는 가끔 누가 물어보면 얘기한다. 나만 알고 있는 상대방의 기억 속에 남는 방법이라고. 음식 속에, 가수나 노래 속에 어떠한 추억의 형태로 남는 방법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