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종업식을 하고 전화를 했다. 들뜬 목소리로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던 유치원 여사친과 드디어 5학년 같은 반이 되었다는 얘기를 전하고 그 친구 집에서 잠깐 놀다가 오겠다고 했다. 다섯 살부터 워낙 친했고 집에도 자주 오가던 친구였다. 알겠다고 했고 한 시간쯤 지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책가방이 무겁고 짐이 많아서 집에 들렀다가 태권도를 가야겠다며 이제 출발한다고 말하고는 끊었다.
무심히 소파에 앉아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외투를 입었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그 친구 집에서 20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오지 않아 걱정이 되면서 무거운 가방이라도 들어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뛰어나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걷다가 내 발걸음이 빨라짐을 느꼈다. 이 시간이면 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서서 내 시야에 있어야 했는데 어디에도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화를 하면 될 일이었지만 뭐가 다급했는지 충전기에 꽂아둔 핸드폰도 잊고 뛰쳐나간 게 화근이었다. 큰아이가 어디 가냐고 다급히 물을 정도였다. 우리 집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핸드폰이 없음을 알았지만 그저 근처에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아이가 돌아올 동선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데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집에 가서 핸드폰을 들고 올까 고민을 하다가 왠지 더 급한 마음이 들어서 조금 더 가봐야지 하면서 걷다가 저절로 뛰기 시작했다. 그 친구 아파트의 놀이터까지 갔을 때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친구 집 인터폰을 눌러보려다가 분명히 그 집에서 나서는 문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집으로 뛰었다. 그러면서도 전화기를 빌려서라도 얼른 아이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답답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주의 깊게 보았다.
'전화를 받고 있는 저 아줌마에게 빌릴까? 꽃 가게에 가서 전화를 빌릴까? 편의점에 가서 빌려볼까?'
그러다가 길이 엇갈려 집에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놀이터와 공원을 유심히 확인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집으로 뛰어가는 머릿속에 갖가지 그림이 그려졌다.
뺑소니, 봉고차 등등 별로 유쾌할 것 없는 단어들이 달려들었고 나는 애써 그들을 뿌리치며 집으로 들아갔다. 번호 키를 누르고 현관 앞의 신발을 제일 먼저 확인했다.
아이의 검은 나이키 운동화가 보이지 않았다. 거실 피아노 위에 충전 중인 핸드폰을 재빨리 들고 다시 나섰다.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는 핸드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는 없었고 아이에게 문자만 하나 달랑 있었다.
"조금 더 놀다 갈게요."
아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친구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들이 태권도 차를 타고 간다고 조금 전 나갔다고, 집으로 가려다가 셔틀 차를 이용하면 되겠다며 더 놀았다고 했다. 지금쯤 셔틀을 탔을 거라고...
분명히 엄마에게 얘길 하라고 했다며 놀랐겠다고 나를 위로했다.
휴우우...
그제야 발걸음을 멈췄다.
아... 그랬구나!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권도에 가면 도착 문자가 오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안 와서 도장으로 전화를 하니 도착했다고 관장님이 말씀하시고 곧 알림 문자가 왔다.
아이는 무사하다.
태권도가 끝나고 또 태연하게 아이는 문자를 했다. "조금만 놀게요."
추우니 잠깐만 놀고 들어오라고 답장을 보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92프로는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 그러나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상대는 바로 우리의 잘못된 상상력이지
오렌지 비치 <앤디 앤드루스>
따스 지난주 미션 문장이었다.
오늘 작동된 나의 잘못된 상상력이 2,30분 정도의 시간 동안 지옥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데스를 만나고 오는 기분이랄까.
아이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연락을 제대로 하라고 잔소리를 했겠지만 너무 놀라니 오히려 아무 말이 안 나왔다. 그저 핸드폰을 챙기지 않은 내 잘못이다. 종종거리던 20분은 운동시간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감사 일기
모든 가족들이 또 작은 집에 모여 있음에 감사합니다. 두 분은 벌써 꿈나라로 가셨고 한 분은 힙합 노래를 듣고 계시네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마시며 노래를 듣고 계신 저분도 감사합니다. 온종일 집 밖에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다고 잔소릴 했지만 안전한 집 안에 있어주는 것도 꽤나 감사한 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