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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oming Oct 31. 2020

방송작가가 먹방을 그만 두자 생긴 일

저, 백수 되나요?


 


두툼하게 썬 고기를 불판에 치익 올리면

하루의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죠.

지글지글 기름이 배어 나오고 표면이 잘 구워지면

특제 소스에 푹~ 찍어서 싱싱한 쌈채소에

한 입 크~게 싸 먹어야 제 맛입니다.

으음~ 얼마나 맛있게요?



 채식주의자인 나는 고기를 먹지는 않지만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고기 먹방 장면들을 수도 없이 제작했다. 작가의 업무는 주로 이런 것들이다. 그 고기가 얼마나 ‘청정 지역’에서 정성 들여 길러졌으며 얼마나 맛있는지 설명하는 내레이션 대사를 쓰거나, ‘육즙 가득’, ‘윤기 좔좔’, ‘군침 꿀꺽’ 같은 자막을 열심히 곁들이는 것이다. 고기를 먹지도 않는 내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역시 많이 이상하다.



먹방을 그만둬야겠다    



 이직이나 퇴직이 쉬운 일은 아니기에, 뾰족한 수 없이 찝찝한 마음으로 오랜 시간 고기 먹방에 일조하며 버텼다. 그러다가 더 이상 먹방을 만들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었다.




 가편집본 모니터를 위해 팀원들이 편집실 컴퓨터 앞에 모여 앉았다. 사료에 홍삼을 섞어 먹이며 소를 키운다는 농장의 촬영본을 함께 보았다. 두꺼운 쇠 울타리 사이로 고개만 겨우 내밀만큼의 틈이 있었다. 그 사이로 소가 혀를 날름 거리며 맛있게 사료를 먹는 장면이 나왔다. 클로즈업된 소의 얼굴을 보면서 모순적이게도 맛있게 먹는 표정과 눈이 참 예뻐 보인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소의 얼굴이 가득했던 화면이 서서히 불판과 오버랩되더니 ‘촤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소고기가 척 얹어지는 장면이 이어졌다. 예쁜 눈이 아직 화면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나는 ‘헉’ 하고 소리 내어 움찔하고 말았다. 그 장면에서 그렇게 반응한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그 화면 전환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싫어하던 사람이라도 막상 얼굴을 보면 수십 번 되뇌어왔던 모진 말조차 제대로 하기가 힘든 법이다. 그런데 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곧이어 그 천진난만한 표정을 배경으로 소고기를 굽다니... 꼭 소에게 '너는 얼마든지 고기가 돼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기분이었다. 밥을 먹는 평온한 표정을 빌려서 '저는 고기가 되어 행복해요'라고 소가 말하도록 만든 것처럼도 느껴졌다.


 "아... 너무 밥을 맛있게 먹던 소가 바로 고기가 되니까 좀 튀는 것 같은데요?"라고 머쓱해하며 돌려 말해봤지만 다들 러닝타임을 효율적으로 줄인 편집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나중에 편집을 맡은 촬영감독님에게 따로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러면서 소의 얼굴에 고기 불판이 겹쳐지기 전에 풀샷으로 농장을 멀리서 비춘 장면 하나만 끼워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감독님은 마지못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엄청난 자괴감이 들었다. 어차피 이런 부스러기 같은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내가 '홍삼 먹은 소'를 홍보했다는 것은 바뀌지는 않는다. 그런데 나는 앞으로도 계속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대세에 지장 없는 부분을 문제 삼느라 잔일을 늘리는 작가가 될 것이었다. 어정쩡하게 타협하며 버티는 것이 나에게도, 팀에게도 민폐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정말 그만해야겠다, 처음으로 제대로 마음먹었던 계기다.



 


 그러나 그 후로도 먹방을 그만 하기까지는 1년이 더 걸렸다. 당시 내가 일하던 방송국에서 만드는 정규 방송 8개 중 5개 이상이 식당을 소개하거나 음식을 다루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었다. 제작 지침으로 ‘시청률 이탈을 막기 위해 더 많은 먹방을 끼워 넣어라’는 얘기가 내려오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결국 다른 방송국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먹방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음식이 주제가 아닌 프로그램은 무조건 먹방으로부터 안전(?)할까? 음식과 전혀 상관없는 프로그램이더라도 시청률을 끌기 위한 장치로 거론되는 1순위가 먹방이다. 방송국을 옮긴 후 시사 프로그램에서 일했는데, 특집 회차를 위해 아이디어 회의를 하면 '패널들끼리 캠핑을 가서 고기를 굽자', '치킨을 먹으면서 진행하자' 같은 얘기들이 나오곤 해서 조용히 마음을 졸여야 했다.


  나도 알고 있다. 채식 먹방이나 비건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줄  있는 예능, 환경이나 동물에 관해 이야기하는 토크쇼   가치관과 충돌하지 않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방법이 남아있다는 것을. 하지만 프로그램 기획을  정도 연차의 작가 혼자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더하고 빼며 아이디어를 다듬어갈 팀원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방송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이러한 이야기를 신나게 주고받을만한 동료를 만나지 못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물권, 환경 문제에 경각심을 갖고 있다. <더 게임 체인저스>를 보고 비건 식단을 유지하며 운동을 하는 선수나 근육을 단련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고, 윤리적 패션을 지향하거나 채식을 기반으로 하는 비거니즘 라이프 스타일을 꿈꾸며 가치 소비를 하는 이들도 많아지는 추세이다. 채식의 필요성을 얘기하고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 유명인들도 이제는 제법 많다. 꼭 다큐멘터리가 아니더라도 이런 문제에 대해 재미있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수많은 방송 프로그램들은 왜 아직까지도 고기 먹방 일색일까? 고기 먹방을 당장 다 그만두자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조금 다른 먹방, 새로운 이야기를 조금 더 시도해봐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몇몇 훈련사들이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강아지 산책의 중요성을 꾸준히 주장한 것이 오늘날 강아지 산책 풍경에 크게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채식의 가치관과 매력을 일깨우는 방송, 친환경적인 삶을 향유하게끔 의욕을 불어넣는 방송들이 활발히 만들어진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풍경 또한 조금씩 달라지게  것이다. 분명히 신선함과 의미 모두를 챙긴 매력적인 콘텐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편의  구직 글이기도 하다.  이상 고기 먹방을 위해 일하고 싶지 않을 뿐인데 일자리 미니멀리즘을 강제로 실현하고 있다. 혹시 비건 예능 프로그램으로 방송가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고 싶은 제작자가  글을 읽고 있다면...


너, 내 동료가 돼라!(...요)



(저... 진지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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