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옷이 좀 없을 뿐인데...
"아~ 입기 싫다니까~"
"잘 어울릴 것 같구만 한 번만 입어봐~"
"아유~ 보나 마나 안 어울려. 다른데 가자 엄마."
엄마에게 이끌려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들르면 높은 확률로 이런 식의 옥신각신이 펼쳐진다. 엄마와 옷 취향이 엇갈리는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나에게 옷이나 가방, 신발 등에 대한 소유욕이 별로 없는 탓이 크다. 언제나 그렇듯 됐다며, 괜찮다며 슬그머니 앞서가는 첫째 딸의 뒤통수를 엄마는 힘껏 째려보고서 '저놈의 기지배, 제대로 옷 한 벌도 없어... 꾸밀 줄도 하나도 모르고! 저걸 누가 데려가냐고~ 에휴' 구시렁 소리를 낸다.
나는 가지고 있는 옷이나 아이템이 많은 편은 아니다. 사계절 입는 옷을 모두 합해도 붙박이 옷장 하나를 채우는 정도이다. 소품의 경우, 노트북이며 마트에서 장 본 것이며 뭐든 마구 넣을 수 있는 커다란 짐 가방이 하나 있고, 중간 크기와 작은 크기의 백 하나씩이 가지고 있는 가방의 전부다. 신발은 운동화 두 켤레, 로퍼와 첼시 부츠 각각 하나, 여름 샌들 두 켤레 이렇게 지니고 있다. 글로 옮겨 적다 보니 '생각보다는 많네'싶기도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30대 여성의 옷장 치고는 간소한 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맥시멀리스트 여동생은 나더러 법정스님에 버금가는 무소유의 대가랬다. 엄마에게는 희대의 패알못으로 낙인찍혀 있다.
처음부터 내가 쇼핑에 뜨뜻미지근했던 것은 아니다. 첫 연애를 시작하거나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즈음에는 옷 입기에 대한 열정이 활활 타오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입는 옷이나 메는 가방을 은근히 살펴보기도 하고,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하거나 여행을 가기 전이면 걸러서는 안 되는 의식처럼 항상 새 옷을 샀다.
그러나 패션에 대한 나의 관심은 옷을 많이 사던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열렬하다고 할 수 있다. 채식을 시작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옷에서도 동물성을 배제하게 되었는데 가죽, 모피, 앙고라, 울 등 동물성 소재를 피하려면 쇼핑 전 강제로라도 공부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비건 브랜드가 생기면 동물이나 환경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낱낱이 살핀다. 물건 구매 전에는 혹시 '친환경, 동물 보호를 내세우며 광고했지만 알고 보니 전혀 아니라더라'따위의 숨겨둔 사실이 있을까 싶어 관련 기사나 리뷰도 꼼꼼히 보는 편이다. 실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제법 많은 양의 정보력과 모험 정신을 쏟아부어야 비로소 나의 쇼핑이 이루어진다. (혹시 위의 동물성 소재들이 왜 문제가 되는지 잘 모르겠다면 클릭해보자)
불굴의 덕력과 의지로 발견한 나의 첫 비건 브랜드는 캐나다의 맷앤냇(matt and nat)이다. 첫 구매 당시 좀처럼 우리말로 적힌 리뷰를 찾을 수 없어서 망설여졌지만, 동물성 소재를 쓰지 않는 것은 물론 나일론, 코르크, 고무, 플라스틱 병 등을 재활용해 소재로 쓴다는 브랜드 철학에 마음이 움직여 지갑을 구매했다. 인조 가죽 가방이나 신발을 대충 저렴하게 샀다가 금방 표면이 벗겨지고 늘어져서 후회한 적이 있는데, 맷앤냇 제품의 비건 가죽은 튼튼하고 상처도 잘 나지 않는 편이다. 오랫동안 잘 쓸 수 있다는 것 또한 중요한 지점이다. 자꾸 새로운 물품을 사야 할 이유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후 구매한 작은 가방과 첼시 부츠도 몇 해째 끄떡없이 곁을 지키고 있다. '남들이 알만한 브랜드에 돈을 좀 쓰지 그래...' 하는 엄마의 핀잔도 있었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내 가치관에 쏙 부합하는 제품을 구매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여타 브랜드 제품보다 훨씬 귀하게 느껴진다.
끝내 실수로 남아버린 쇼핑도 있다. 겨울에 야외 촬영을 하는 프로그램에 배정이 돼서 패딩이 한 벌 필요했다. 오리와 거위의 털을 산 채로 뽑아 속을 채운 덕 다운이나 구스 다운은 절대 사고 싶지 않았다. 웰론, 신슐레이트 같은 대체 충전재가 있기는 한데 이것들은 또 썩지 않는 쓰레기라고 하니 구매하기기 조금 망설여졌다. 그러다 '리사이클 다운'의 존재를 알게 됐다. 침구류나 중고 패딩 등에 쓰인 오리 및 거위의 털을 재활용해서 만드는 패딩이었다.
'오~ 이거 좀 괜찮을 것 같은데!'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다. 만들어지는 과정을 위해 동물이 추가로 희생된 것이 아니고, 신소재 충전재로 만든 패딩보다는 플라스틱 소재가 덜 쓰이기 때문이다.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다 주문한 패딩을 받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태그를 확인하니 모자에 다소곳하게 부착된 퍼의 소재가 '라쿤'이라고 적혀있었다. 머리가 띵했다. 라쿤에게서 털을 어떻게 얻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처음 문의했을 때 충전재 외의 겉감은 모두 폴리에스터 100%라 하지 않았느냐, 라쿤 퍼도 리사이클 작업을 거친 것이냐 곧바로 재문의를 했다. 돌아온 대답은 '착오가 있어 정말 죄송하다, 원하시면 교환해드리겠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리사이클 다운 방식을 택한 이유가 패션을 위해 행해지는 동물 착취를 줄이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런데 라쿤 퍼라니... 실망감과 절망감이 몰려왔지만 교환을 하지는 않았다. 폐기하게 되면 멀쩡한 패딩 하나만 쓰레기가 될 것이다 보니 그냥 아껴서 오래 입기로 했다.
우리는 왜 패션에 몰두할까. 내가 입은 옷이나 착용한 소품이 내 정체성을 대신 드러내기도 하고, 내 존재감을 시각적으로 각인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남들과 달라 보이고 싶고, 조금 더 돋보이고 싶다는 우리의 욕망들이 모여서 동물과 환경에 저지른 일은 이미 엄청나다. 옷장에 입을 옷이 없다는 이유로 버리고 사기를 반복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 업보에 명백히 동참한 것이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다.
'우리가 너무 지나쳤다'는 반성문이 패션계에서 흘러나온다. 구찌, 샤넬, 버버리, 베르사체, 아르마니 등 기라성 같은 브랜드들이 동물 모피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퍼 프리(Fur-free) 선언을 했다. 마쥬, 산드로, 끌로디 피에로가 악어, 뱀 등 파충류 가죽 사용을 중단하겠다고 밝혔고, 발렌티노는 2021년 말부터 알파카 울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세계 최대의 알파카 농장에서 이뤄지는 동물학대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제야?'라는 생각은 꾹 누르고 변화의 바람에 그래도 응원을 보내본다. 이러한 흐름은 가죽과 양털 등 우리의 일상 속 가장 가까운 소재에까지 파고들 것이다. 세상은 분명 바뀌고 있다. 모피와 악어가죽 등이 여전히 최고급이라는 인식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곧 다가올 패션계의 흐름을 거스르느라 고단하고 외로울 것이라 짐작해본다.
쇼핑 전 벼락치기라도 하듯 이것저것 공부하고, 시행착오를 겪어온 나는 비건 쇼핑의 달인이 되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동물성 소재를 쓰지 않는다고 선언하거나, 소재를 재활용하거나, 식물성 가죽을 사용하는 등 괜찮은 비건 브랜드를 많이 알게 됐지만 쇼핑 횟수는 훨씬 줄어들었다. 쇼핑을 한 번 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 소모를 하게 되기 때문이고, 필요 이상의 과도한 쇼핑이 결과적으로 자원 낭비와 영원불멸의 쓰레기로 이어질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자칭 미니멀리스트, 타칭(특히 엄마에게) 패알못이 되었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옷이 적다고 해서 부끄럽지는 않다. 옷을 적게 가지는 삶을 내가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나와의 싸움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내가 자주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꼭 화려하고 트렌디하고 옷이 많아야 패션을 잘 아는 것일까? 내가 가진 것이 적더라도 각각의 것들을 애정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고, 오래 입거나 착용할 수 있도록 소중히 다루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 또한 패션을 잘 알고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