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가 심하다고 외출을 자제하라는 문자를 받은 날이야. 이런 날은 산책을 하기가 꺼려지지만 오늘 밤엔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할 것 같아. 나는 생각을 정리하려면 일단 걸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게다가 너랑 함께 한 대부분의 시간을 곱씹어보면 걷고 또 걸었던 기억만 나거든.
네가 지방의 소도시에 있는 청소년 교정시설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 넌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면서도, 교정시설이라니 많이 힘들겠단 생각도 들더라.
넌 가끔씩 뜬금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었어. 그날 밤, 홍대의 뒷골목을 걷던 밤에도 너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아이스 초코를 파는 곳을 안다며 내 손을 잡고 이끌었지. 작은 가판대를 놓고 음료류를 팔고 있는 친절한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우릴 맞아주었던 기억이 나. 우린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아이스 초코를 하나씩 들고 여느 때처럼 걷기 시작했지.
그날 밤 너의 질문은 '불행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것이었어. 아이스 초코를 손에 들고 걸으면서 불행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껴졌었지만 너는 그 전에도 항상 그렇게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었으니까 별다르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거 같아.
나는 그저 빨대로 그 달달한 음료를 쭉 빨면서 생각나는 대로 불행에 대해 이야기했어. 평소랑 달랐던 건 너의 반응이었어. 항상 특별할 것 없는 내 대답에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며 치켜세워주던 너였는데 그날은 그저 묵묵히 내 대답을 들어줄 뿐이었지.
골목에 점점 깊게 들어설수록 내가 알던 홍대의 거리는 형태를 바꿔가고 있었어. 사실 내가 알고 있던 서울의 모습이라는 것이 그저 '맛집'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을 찾아다녔던 것이라서 '진짜' 서울의 모습이랑은 거리가 멀었던 것일 테지만 말이야.
가로등이 점점이 쭉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양 옆으로 빌라 건물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골목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가끔 열린 창 틈으로 설거지하는 소리나 TV 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빼면 그 골목길은 해저처럼 고요했던 기억이 나. 이제 막 가을에 접어들고 있던 그 밤길에 우리의 그림자는 가로등 불빛에 따라 앞서서 나타났다가 뒤로 물러 섰다가를 반복하고 있었어.
우리가 샛노란 가로등 불빛에 완전히 잠기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차박차박’ 물 소리가 들리는 듯 했어. 분명 물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메마른 시멘트 바닥이었는데 말이야. 평소와 다른 이상한 밤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그때부터였을 거야.
다리를 쉬려고 놀이터에 앉았을 때 넌 '통돌이 세탁기'이야기를 시작했어. 세탁기가 작동하면서 내는 규칙적인 소음이 파도 소리와 비슷해 멍하니 앉아 그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고. 나는 그저 섬이 고향이었던 네가 그런 식으로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때가 있나 보다 했을 뿐이었지.
뒤이어 너는 바다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차에 태우고 일터까지 데려다 주던 아침이 생각난다고 했어. 너의 키가 천천히 자라는 동안 매일 반복되던 일상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고도 했지. 너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그 밤이 처음이었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혼을 하시게 되면서 너는 점점 더 바다가 그리워졌다고 했어. 새어머니는 분명 좋은 분이셨고, 이복형제들도 너에게 잘 대해줬다고 했지만 알 수 없는 마음의 벽 같은 것이 느껴지는 건 별 수 없었다고 했지. 어머니의 기일이 다가오면 자꾸 눈치를 보게 되는 것도 속상하다고 했어.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도 그 섬의 바다는 예전에 네가 알던 바다가 아닌 것만 같았다고 했지. 그 바다는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아서 바다를 더욱 그리워하게 됐다고 말했어.
나는 어깨를 들썩이는 너의 옆에서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등을 쓸어주는 것 밖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 네가 불행에 대해서 물었던 건, 이 이야기를 해주려고 그랬었구나 싶었지. 나는 앞선 너의 질문에 보잘것없는 답변을 한 것을 후회하면서 너의 울음이 잦아들길 기다렸어. 그리고 너의 울음이 잦아들기 시작했을 땐 발 아래서 찰랑이던 가로등 불빛에 바짓단이 젖어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때 난 바다를 그리워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어느 곳이든 바다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어.
너와 헤어지고 언젠가 읽었던 G.K.체스터톤의 소설엔 '무언가를 사랑하려면 그것이 사라질 수도 있음을 깨달으면 된다'고 적혀 있었어. 그때의 난 그걸 몰랐던 사람이었지. 이제 막 사회초년생이 되었던 그때의 난 정신없이 하루가 시작되고 끝나는 와중에도 너를 만날 때만큼은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어. 이기적이게도 너의 한결 같음이 끝없이 계속될 줄 알았지.
그날 밤 이후에도 우리는 얼마간을 더 만났지만 우리가 헤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날 밤이 처음이었다고 생각해. 그때의 난 너에게 무엇이었을까? 왜 그렇게도 무력했을까? 우연히 듣게 된 너의 소식에 하루 종일 마음이 가라앉는 건 왜일까?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네가 여전히 바다를 그리워하는 사람일지 궁금해. 아마 답변은 영영 들을 수 없겠지. 어디서든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그 생각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