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룩스 Nov 25. 2024

도마뱀의 등을 쓰다듬으면


 도마뱀의 등을 쓰다듬으면 까슬까슬한 감촉이 느껴진다. 그 까슬까슬한 느낌은 오래되어 부분 부분이 헤진 카펫을 만지는 느낌 같기도 하고, 이끼나 나이테가 새겨진 나무의 단면을 만지는 느낌 같기도 하다.  

 불규칙한 무늬가 새겨진 등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으로 훑고 있으면 그 작은 생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녀석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고동에 따라 등이 아주 조금씩 올라갔다 내려 갔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녀석의 그런 감촉과 숨결을 느낄 때면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끼곤 하는데, 손가락으로 전해져 오는 느낌도 그러하지만 그 작고 약한 생물이 내게 가만히 자신의 등을 내어준다는 행위 자체가 더욱 내 마음에 따스함을 가져다 주는 것 같다.

 이렇게 등을 쓰다듬을 수 있기까지 많은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녀석을 처음 집에 데려온 것은 지난 여름이었다. 그때만해도 내 손가락 하나 정도의 크기였던 녀석은 겁이 너무 많아 등을 쓰다듬기는커녕 자신을 향해 내가 손만 뻗으려고 하면 후다닥 도망 다니기 바빴다. 그 좁은 사육장 안을 얼마나 빨리 뛰어다니는지 저러다 몸살이라도 나는 거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러다 같이 지낸 계절이 하나씩 늘어가고 녀석의 몸집도 제법 불어나면서 차츰 내가 자신을 헤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내 손길에 적응을 해주기 시작했다. 내가 조심조심 손을 뻗어 녀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먹이를 주어도 도망치지 않기 시작했을 즈음 나는 녀석의 등을 손가락으로 만져보기 시작했다. 

 마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도 하듯 조금 쓰다듬다가 녀석이 돌아보면 얼른 손가락을 멈추고, 다시 눈치를 보다 슬쩍 쓰다듬기를 여러 차례, 어느 순간부터 녀석은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주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성급하게 만지려 하거나 예고 없이 접촉을 하려 들면 재빠르게 내 팔을 타고 올라와 내 머리 위로 도망가기 바쁘지만 말이다. (녀석은 내 안경을 올라탈 기구 정도로 생각하는지 얼굴에 조금만 가까워지면 안경을 향해 뛰어오르곤 한다)

 하루는 집에 오랜만에 어머니가 다녀가신 적이 있었는데, 내가 도마뱀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쓰다듬고 있으니 화들짝 놀라, “너는 왜 애가 점점 돌아이가 되어 가니?”라며 새된 소리를 질렀었다. 

 어머니는 TV를 보다가도 화면에 뱀이 나오면 눈을 질끈 감으실 정도로 뱀을 싫어하는 분인지라 이해가 가긴 하지만 녀석은 뱀이 아니라 도마뱀인 걸요. 앙증맞은 다리가 4개나 달려있는데……. 

 그날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시며 그런 거나 끼고 앉아 있지 말고 밖에 나가서 여자를 좀 만나라며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셨었다.

 내가 아무리 주말에 집에만 있는다고 해도 날이 좋은 건 알고 있다. 밖에 나간다고 여자가 만나지는 게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어서 집에 있을 뿐이다.

 물론 밖에 나가서 여자 좀 만나라는 어머니의 말은 집에만 있지 말고 밖을 나가야 그나마 여자를 만날 확률이라도 생기지 않겠냐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누군가를 만나다는 것, 연애를 한다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예전에는 어떻게 했었지? 그런 일이 나한테 실제로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인 것만 같이 느껴지곤 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말대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 즉 연인을 갖는 다는 것은 신을 갖는다는 뜻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나는 이 작은 생물이 자신의 등을 기꺼이 내어주는 행동에 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 대 사람은 아니지만, 생명체 대 생명체로써 ‘신뢰’라는 것이 생겼다는 뜻일 테니까.

 생각해보면 사람 대 사람이라고 다를 것이 있을까?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 연인이라는 존재도 지난한 시간 동안 아주 느린 속도로 상대를 향해 손가락을 뻗고, 거둬들이기를 반복하며 ‘이해’라는 쓰다듬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처음엔 도마뱀의 등에 새겨진 무늬와 같은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그 불규칙한 무늬들을 해석하려 들다가 결국엔 나를 매료시킨 그 무늬가 사실은 그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음을, 내가 보듬어야 할 부분임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아닐까. 

 내가 녀석의 등을 쓰다듬으며 느끼는 까슬까슬한 감촉은 사실 내 마음의 겉면의 감촉과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녀석과 나는 서로의 등을, 서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서로에게 기꺼이 내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임진왜란과 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