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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 Mar 25. 2019

표선 조선소

멀리 항해하기 위해 잠시 쉬는 중이라 생각하자.


표선 항구를 산책하다가 표선 조선소에서 수리중인 배를 만났다.

물에 둥둥 떠있는 배를 여러 차례 보긴 했어도 이렇게 배의 밑창까지 다 드러난 형태는 처음이었는데,

멈춰 선 배의 모습에서 지금의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만약에 이랬으면 어땠을까...

부모님이 화목했더라면, 좀 더 부잣집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릴 때 불이 나지 않았더라면, 

색깔을 잘 봤더라면, 


이런 생각들에 갇혀 멈춰서 버렸던 시절,

그때 더 열심히 했더라면...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던 문제들을 가지고 한탄만 하던 시간들이 결국 발목을 붙들고 넘어뜨렸고, 그대로 나자빠져 걷잡을 수 없도록 망가져버렸다.


그랬던 내게 찾아온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폐쇄병동에서 보낸 기간들 이었다. 

닫혀진 공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몇 개월간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고, 그 시간들이 모여 나의 많은 부분을 바뀌게 만들었다.


한동안 놓고 있던 그림을 다시 그렸고, 사람들과 어울려 다닐 수 있게 되었으며, 이전보다 하루를 열심히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어쩔 수 없었던 것들과 많은 부분 화해를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표선 조선소의 용창호는 마치 금방이라도 수리를 마치고 바다로 향할 것만 같았다.

걸쳐져 보이는 수평선과 하늘, 그날의 공기들이 멈춰 선 용창호가 아니라 공간을 항해중인 모습같았다.


영원한 것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고, 무엇이든 낡고 지치고 망가지는 법이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멈춰야 하는 때가 꼭 한번은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내게는 폐쇄병동에서의 기간이 보다 삶을 멀리 항해하기 위해 멈춰 서야 했던 지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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