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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 Apr 23. 2019

삶의 굴레

하수도에 핀 꽃을 바라보다가


작년 가을쯤엔가 동네 해변을 걷다가 하수도에 자리 잡은 생명을 만났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꽃인지는 몰라도 자리 잡은 그곳에 꽃까지 피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다 이곳에 흘러들어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악한 환경에서도 햇빛을 받기 위해 올라와 잎을 열고 꽃을 피운 모습에 마음이 동했다.


환경을 선택해 태어나는 경우는 없을 것이지만, 태어난 곳이 어떤 환경이든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고들 말한다. 

이 이름 모를 꽃도 제주의 편안한 오름이나, 누군가 정성을 다해 키우는 화단, 혹은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들판 어디쯤이 바라던 가장 완벽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이곳에 흘러들어 왔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숱한 고통으로 얼룩졌던 과거, 그 과거가 만들어낸 지금의 결과물인 나 역시도 원해서 이런 삶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응당한 삶의 태도겠구나 여기며 꽃을 한참이나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생명은 햇빛을 받고 자라기 위해 열심히 자라난다. 하수구에 삶은 그에게 녹록지 않았을 테니 보다 치열하게 매일을 보냈을 터. 그런 모습이 대견스러워 열심히 스케치를 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수록 약간 이상한 지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가위로 잘라낸 듯한 잎들이 보이는 걸까?


그림을 그리며 찬찬히 살펴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수구를 막아둔 구조물에서 세로로 막힌 부분들에 맞닿은 잎들이 유독 가위로 자른듯한 모양이 많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답이 떠올랐다.

누군가 무심코 밟고 지나간 흔적이 구조물 위로 올라선 잎을 잘라버린 흔적이라는 것을.




자라온 환경을 넘어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딛고 일어서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난 이들을 우린 잘 알고 있다.

그런 이들은 우리에게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며 삶의 용기를 전한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은 누구에게나 그런 삶을 허용하지 않는다.

타인의 귀감이 되고 삶의 지표가 되는 사람은 흔치 않기에 우리가 그들을 위대하다 말하는 것일 테니.





가난한 집, 순탄치 않던 환경, 좋지 않은 학벌, 가진 것 없는 현실.

이런 것은 나의 배경일뿐 올바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믿어왔다.

올바른 생각과 자신을 믿고 열심히 살아가면 모두가 오롯이 나를 바라봐 줄 것이라 믿었다.

내가 피울 꽃은 그런 꽃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일종의 자기 최면일 뿐, 지독한 현실은 결국 하수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나를 가두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를 가둔 모든 것을 벗어나려 할수록 결국 밟혀 잘려나가 버리는 그런 삶, 그런 굴레가 내게 씌워져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피웠을 꽃이 비루한 현실을 딛고 일어난 삶의 올바른 자세라 생각했던 순간이 그림을 그릴수록 슬프게 느껴졌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제대로 노력하지 않은 네 탓이라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모든 이가 노력하면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지금의 현실에 죽을 만큼 노력했노라 말할 수는 없을 테니. 





하수구에서 피어난 꽃은 감옥 같은 현실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굴레를 벗어나려는 그의 노력이 더 아픈 상처를 몸에 새기며, 되려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꽃을 피웠으니 다음 생명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잖아.


꽃을 피웠으니 다음 생명은 더 잘 자라길 바라는 것으로 위안하면 될까. 내게 그런 대화는 고된 노동 끝에 술에 취해 돌아온 아버지께서 나와 같은 삶을 살지 말라던 푸념처럼 느껴질 뿐이다.





고작 이 정도의 그림을 그리면서 참 우울한 생각을 과하게 했나 싶다. 그저 대견한 이 생명을 아름답게 바라봤어도 되었을 것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열심히 꽃 피운 이 생명에 보다 따뜻한 색감으로 칠을 하고, 사랑스러운 빛감으로 처량하게 보이지 않도록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자신을 위로하듯이. 


그림을 다 그리고 그 장소를 다시 다녀왔다. 겨우내 죽은 듯 웅크리고 있던 생명은 다시 봄의 햇살에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잘 살아가고 있어 줘서 고마웠고, 올해도 멋진 꽃을 피울 때 다시 들러보겠노라 다짐했다.


참 많은 생각으로 여러 가질  돌아볼 수 있었던 이야기로 꽤나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바라건대 다음번에는 우울함을 걷어내고 보다 희망찬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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