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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스키 Oct 14. 2023

평일엔 소설 쓰고, 주말엔 커피를 내립니다.

  아이스 일색이던 주문에 드문드문 따뜻한 아메리카노, 따뜻한 카푸치노가 들어오는 요즘. 주방 한편에 난 유리창으로 주말 오후의 볕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손님을 맞이하는 바 테이블에 길게 드리운 서너 시의 볕이 좋다. 눈을 감고 뜨뜻한 햇빛을 흠뻑 받으며 광합성을 하고 있자면 열어둔 창문 틈으로 원두 볶는 향이 솔솔 불어온다.

  멍하니 앉아 볕을 쬐다가 노트북을 열어 이렇게 적어 본다.

  ‘좋아하는 공간 좋아하는 시간 좋아하는 향, 그리고 내 앞에는 좋아하는 잔에 내린 커피 한 잔이 있다. 아무래도 나는 이 순간을 먼 미래에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시각은 사진으로 간직할 수 있는데 후각과 촉각은 저장해 둘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글에다 고소한 향과 따스한 온기를 담아두고 싶다.’


  시장 입구와 닿아 있는 카페에 주말마다 출근 도장을 찍은 지 어느덧 한 달하고도 보름. 손그늘을 만들어 가리지 않으면 눈 뜨기가 쉽지 않던 뜨거운 여름을 지나 한낮에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제법 서늘한 가을이 되었다.

  첫 출근부터 카페에 있는 동안 입기로 정한 나만의 유니폼은 하얀 린넨 셔츠였는데 이제 슬슬 춘추복을 골라야 할 것 같다. 소매를 걷어 올린 손목이 쌀쌀하다. 어차피 고민의 폭은 넓지 않고 결국 종착지는 조금 더 따스한 소재의 하얀 셔츠겠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이 들어와 샷을 내렸다. 창가 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두꺼운 책 옆에 우드코스터를 깔고 유리 빨대를 꽂은 컵을 내려놓은 뒤 주방으로 돌아왔다. 가방도 없이 책 한 권만 손에 쥐고 온 손님은 카페 안을 둘러보며 중간중간 놓인 식물 친구들에게 눈길을 두고 있다. 배경음악을 조금 더 잔잔한 피아노 음악으로 바꿔 틀었다.


  포터필터와 샷잔을 정리하고 그라인더 옆에 떨어진 원두 가루를 털어냈다. 손을 닦고 잠시 의자에 앉았다. 창밖으로 조각구름이 보인다. 짙은 녹색 빛깔 산자락 너머로 하얀 털뭉치 같은 구름이 숨었다 나타났다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우리 카페는 4층에 자리 잡고 있다. 주위에 키 큰 건물은 드문 편이다. 덕분에 사방에 난 창을 통해 마주하는 풍경은 거리의 소음, 지나가는 이의 발걸음, 분주한 오토바이, 비상 깜빡이를 켜고 선 자동차가 아니다.


  이 창문에 걸리는 그림들은 그때그때 다른 생김새의 구름이고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을 산자락이고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하늘이자 노을이고 때때로 하늘의 색을 머금은 빗방울이고 주변 키 작은 건물의 정수리다. 이불 빨래가 걸려 있는 빨랫줄이거나 덩굴 식물이 늘어져 있는 화단이거나 벤치 테이블에 꽂힌 파라솔이 펄럭이는 옥상들. 그리고 이따금 전신주 꼭대기에 앉아 볕을 쬐는 비둘기들.


  나는 아마 이 정도의 속도감을 편안하게 느끼고 좋아하는 것 같다. 배달 오토바이의 빠름 보다는 사부작사부작 산책로를 걸어 시장에 다녀오는 느림. 일회용 빨대의 생산과 활용, 버려짐의 빠름 보다는 유리 빨대의 만들어짐과 쓰임, 그 빨대를 다시 쓰기 위해 수세미로 겉을 닦고 솔을 집어넣어 안을 닦고 뜨거운 물을 끓여 소독하는 과정이 뒤따르는 느림. 버튼을 누르자마자 컵에 떨어지는 자판기 커피의 빠름 보다는 원두를 갈고 종이 필터를 접어 드리퍼 위에 얹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가지런해진 원두 가루 위에 가느다란 물줄기를 떨어트린 뒤 서버에 커피가 내려오길 차분히 기다리는 드립 커피의 느림.






  책을 읽던 손님이 떠난 자리를 치우고 테이크 아웃 드립 커피를 두 번 내렸다. 도처에 널린 빠름과 시간을 내어 다가가야만 찾아지는 느림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밤이 되었다.

  나는 정오의 해가 기울기 시작해 저녁놀을 선사한 뒤 밤이 손님처럼 들어와 눌러앉을 때까지 카페를 지키다 소란스런 시장 골목이 조용해질 무렵 퇴근한다.


  슬슬 퇴근을 준비할 시간이다. 내일도 열심히 커피를 만들어야 하는 그라인더와 커피머신, 모든 손잡이, 고생한 포터필터,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뜨거운 물 샤워를 반복한 드리퍼, 드립서버를 뽀득뽀득 닦아 말려 놓고 행주를 빨아 넌다. 창문을 닫는다. 문가에 서서 잊은 일이 없는지 잠시 헤아려 본 뒤 소등한다. 밝던 공간에 조명 빛이 사라지고 창밖의 어둠이 들어온다. 마지막으로 종일 고요를 밀어내던 배경음악의 전원도 오프. 각자 성실하게 제 역할을 하던 동료들을 쉬도록 한 뒤 문을 잠그고 건물을 나선다.


  어둑어둑한 시장 골목을 뒤로 하고 역으로 향하는 언덕을 걸어 내려간다. 밤공기를 맞으며 메모 앱을 열어 이렇게 적어 본다.

  '소설을 쓰는 일은 괴롭고 힘들고 춥고 아주 고되니까 카페에 있는 동안 이 글을 쓸 때는 편안하고 따뜻하고 즐거우려 한다. 나는 나를 평가하지 말 것. 그저 풀어놓고 신나게 놀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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