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의 이유
이전 편에서 얘기한 것과 같이 첫 번째 이유는 인간으로서 존중을 해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는 이유라 생각한다. 이곳뿐만 아니라 많은 직업들이 고객을 대해야 하고 사람대접을 못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은행원으로서의 디폴트값이라 생각하고 무시하면 되는 사람들도 더럭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둘째, 책임의 소재가 기업이 아닌 나에게 있다. 내가 고의로 잘못을 하지 않아도 사고가 터지면 나의 아주 작은 실수마저 은행이 커버해주지 않는다. 나의 대출 하나하나에 책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10년 전, 20년 전에 간단히 나갔던 신용대출과 전세자금대출이 문제가 생기면 기억도 안 나는 건 때문에 소송이 걸릴 수도, 내 재산을 잃을 수도 있는 문제다. 그 고객의 대출이 상환되기 전까지는 내 책임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루에 쉽게 개인 당 10건 이상의 대출이 나간다. 30건의 대출이 연장되고 신규만 최소 10건이다. 집단대출이 나가는 지점의 경우에는 그 수가 몇 배는 뛴다. 몇 십 년 전의 대출이라. 사실 세 달 전에 나갔던 대출도 기억이 안 나는 경우가 많다.
은행의 입장을 한 번 들어보자. 은행은 대출이 많이 나갈수록 좋다. 물론, 신용이 안 좋고 부실확률이 높은 대출의 경우에는 당연히 안 나가는 게 낫다. 그러나 고객사정은 신용등급과 담보목록, 소득자료, 재무제표 외에 알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이 기업이 몇 년 뒤에 부도가 날지, 이 사람이 당장 다음 달에 무직자가 될지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웬만한 큰 문제가 여실히 보이지 않는 이상 대출을 감행한다. 때로는 심사까지 올려서 나가는 대출도 있다. 행원 개인이 원하지 않는 대출도 상급자가 나가기 원하는 대출은 나가야 한다. 큰 대출의 경우 지점 실적과 순위에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출에는 도장들이 찍히고 그 도장들의 주인이 이 대출 책임의 소재가 되는 거다. 이 대출이 나가길 원치 않았던 작은 행원 또한 책임을 같이 지게 된다.
대출이 부실이 나거나 관련 민원이 들어오면 은행은 그 대출을 깐다. 실행되는데 문제가 있었는지, 혹시나 실수한 부분은 없는지 표기 하나,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해부한다. 그리고 불운하게도 증거가 발견되면 책임을 묻는다. 10년 전에 나갔던 대출의 경우 큰 책임자들은 은퇴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어린 행원 하나가 기억도 나지 않는 10년 전 자료들을 뒤져가며 해명을 하고 몇 주 혹은 몇 달을 시달린다. 그렇게 시달려도 해결될 거란 보장도 없다. 책임이란 그런 거다. 그리고 실제로 문제가 명백할 경우에는 자비로 메꿔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은행은 곧 돈이기에 돈에서 실수가 나면 돈으로 메꿔야 한다. 은행은 책임져주지 않는다. 신중해야 함이 맞다. 그러나 살면서 그 누가 실수를 안 해봤겠는가? 일하면서 실수 한 번도 안 해본 자만이 돌을 던질 수 있다. 실수를 하지 않아도 실수를 언제나 할 수 있음을 알기에 마음을 졸인다. 내가 찍은 도장이 몇 십 년이 지난 후까지 문제가 없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으로 불안하게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개인대출은 몇 억이 나갈 때도 있고 기업대출의 경우 단위가 훌쩍 뛰기도 한다. 그중 내 책임이 10% 있다 해도 그게 대체 얼마인가. 전재산을 날릴 수도 있지 않은가.
은행이 돈을 왜 많이 주는지 알아? 나중에 메꿀 일 생기면 메꾸라고 그러는 거야.
라고 내 선임이 말한 적이 있다. 정말 소름 끼치게 무서운 말이다. 가끔은 수수료 1천 원 정도겠지만 그 단위가 커지는 건 순식간이다. 거기다 더 무서운 말은 그다음에 나온다.
돈으로 메꿀 수 있는 문제면 행운인 거다.
듣는 순간 도망을 결심하게 됐다. 적성에 맞지도 않고 보람차지도 않은 일. 리스크로 짊어질 만큼 값어치가 없었다. 물론 좋아한다면 참고 실수 안 하게 잘하고 아닌 것 같은 업무는 안 하는 뚝심을 가지면 되겠지만, 당시 나에게는 그런 간절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