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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덩이 Apr 04. 2023

나와는 다른 사람을 원해

이상형 일지

이상형. 누군가 물어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상기되고 심장이 뛰었다. 꿈에 그리던 이상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주섬주섬 꺼내 펼쳐 보여주는 것처럼 부끄럽고 쑥스럽고 괜히 그랬다. 다른 이의 이상형을 물어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이상형은 그 사람의 거울과도 같았다. 그것이 볼록거울일 수도 오목거울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또는 바라는 본인의 모습 중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상형 역사를 돌아보면 참 많이도 바뀌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연애했던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많이 바뀌었다. 여태껏 이상형만을 만난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이상형 목록 3-a에 걸맞은 사람을 만날 때면 그 항목이 지워질 때도 있고 1-c로 승격될 때도 있었다. 실제와 이상은 다르기에 경험을 통해 점점 다듬어나가는 과정이었다.


예전에는 하얗고 안경 쓴 남자가 좋았다. 마치 성시경과 이석훈 같은 뽀얗고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사람. 죄가 많은 교회오빠 말이다. 내가 투정을 부릴 때면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고 모르는 게 있으면 손수 가르쳐줄 수 있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면 내가 그만큼 따뜻해지고 성숙해질 줄 알았다. 아직도 그런 교회오빠 스타일은 만난 적은 없지만 기존에 연애들, 또는 가벼운 만남들을 통해 나는 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어른스러운 사람들을 지루해하거나 가끔은 꼰대라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나 스스로가 충분한 생각을 거쳐 인생을 헤쳐나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가르침보다는 조언과 격려를 줄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형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건 꽤나 재밌는 일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가 이상형 테스트를 통해 바로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내가 데이트 코스를 짜고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겉으로는 무조건 양보한다. 마치 배려 많고 선호가 없는 사람처럼. 친구들이나 회사동료들과 함께일 때는 주도권을 무조건 넘기는 타입이다. 그래서 나는 리더보다 팔로워인 남자가 이제는 좋다. 무엇을 할지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지 않는 사람. 내가 정하면 흔쾌히 따라와 줄 사람. 본인이 나를 배려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결정해 주는 것에 대해 편하게 느끼는 사람. 내가 숨겨온 결정권에 대한 욕망을 편하게 표출할 수 있게 해 준다면 반은 먹고 들어갈 것 같다.


무엇보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끌려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굽히고 실실 대는 유형이다. 꼰대가 판치는 사회에서 굴리기 쉬운 사원 1 역할을 맡으면 딱이다. 입에는 예의 차리는 기본적인 미소가, 눈에는 반자동적으로 나오는 눈웃음이 탑재되어 있다. 그래서 항상 손해 보고 혼자 속으로 마음 끓이기 일쑤다. 사람에게 스트레스받고 혼자 방에서 넷플릭스로 푸는 스타일 말이다. 참고로 MBTI가 INFJ다. 사람을 믿지 않고 가면을 잘 쓴다.


이상하게도 나는 나와 다른 쾌남인 사람에게 끌린다. 사람들의 중심에서 항상 걱정 없이 웃는 리더형 말이다. 그러나 예의나 격식을 중요하게 따지는 나이기에 쿨함을 빙자한 무례함은 딜브레이커다. 어른스럽게 중심을 잡고 사람 대하는데 거침이 없으나 모두에게 믿음직스러운 형 역할을 맡은 사람이면 나는 자연스럽게 눈이 간다. 보통 이런 사람은 여자들보다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재밌는 형, 좋은 형, 편한 형. 그런 형 같은 사람은 나의 단점을 그대로 커버해 준다. 걱정이 많은 내가 골골거릴 때 그가 '그게 뭐', '그건 자연스러운 거지'라고 얘기해 주면 내 걱정이 한낱 우주먼지로 소멸해 버린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주로 많이 싸운다고들 한다. 실제로 나와 다른 사람들을 여태껏 만나왔고 그때마다 꽤나 많이 다퉜다. 그래도 결론적으로 보면 내가 많이 성장했다. 사람들 사이에 치여서 혼자 구석에서 눈물 흘리던 내가 이제는 가끔 무시하고 넘어간다. 쾌남들을 통해 걱정을 덜고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아마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면 우리 둘은 땅굴을 파고 끝없이 들어갔을 것이다. 서로의 고민을 쉽게 공감할 수 있고 유사한 과거를 가졌겠지만 그만큼 발전은 없는 거다.


나와는 다른 사람을 원한다. 나 스스로가 싫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서로의 장점은 알려주고 단점은 보완해 나갈 수 있는, 서로의 다름으로 서로가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때로는 부딪히고 때로는 맞춰가며 함께 성장하는 관계, 그것이 내가 바라는 이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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