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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git Nov 25. 2018

지혜랑 지식은 달라.

할머니가 보고싶은날.

우리 할머니는 까막눈이셨다.


그리 못살지 않는 집안의 큰딸.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여자애가 무슨 공부냐! 고 엄포를 놓는 아버지때문에 공부하지 못하신 분이다. 할머니의 여동생들은 아버지 눈을 피해 이렇게 저렇게 조금씩 글을 배웠다고 하는데, 할머니는 큰딸이다보니 그럴 여력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들은 나름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업을 가졌지만, 딸들은 어찌 저리 함부로 대하셨을까.. 지금도 이해가 안가는 일이다.


어린시절 버스도 척척 잘 타시는 할머니가 당연히 글을 읽으실 줄 알았지만, 할머니는 그 많은 간판들을 모두 그림으로만 인식하셨던거고 숫자정도만 알고 계셨으니 젊은 시절 남편이 죽고난 후 얼마나 많은 세월을 세상의 속임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계셨던것일까 상상만해도 끔찍했다. 사실 할머니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나도 다 큰 후에 알았다. 할머니는 모든 그림을 외우고, 상징으로 만들어서 절실히 외우고 익히고 계셨던거다. 

노인대학에 다니시며 이름을 좀 더 정확히 쓰는걸 배우시고 가나다라, 단어, 문장들을 쓰고 익히시는걸 나중에 보고 그제서야 할머니가 글을 모르신단 사실을 알았으니.. 할머니의 자식들도 손주들도 참 매정한 인간들이었다. 왜 그때, 몰랐을까.


나는 참 겉껍질로 사는 사람들이 많은 세대에 살았다.

공부를 잘하는지, 집에 돈이 많은지, 얼마나 좋은 차를 타는지, 얼마나 좋은 학교를 다니고 졸업했는지, 직업이 무엇인지가 그사람의 모든것을 결정했고 지금도 거의 그렇다.


한참 무상급식문제로 시끄럽던 시절, 할머니한테 놀러가서 챙겨주시는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티브이에 '무상급식 찬반' 이야기가 한참 나오니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 미친것들. 애들 밥먹이는걸로 준다 만다 싸우다니. 밥굶는 애들 없는게 좋은세상이지. 애들 밥 가지고 협박하는 놈들이 좋은 사람들일리가 없다."

나는 할머니의 그 이야기가 너무나 좋았다. 할머니가 지혜의 여신같은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좋은 학교를 나오거나 좋은 직업을 가진, 돈 많은 사람들이 별것 아닌것으로 싸우며 정쟁을 만드는 동안 우리 할머니처럼 못배우고, 혼자되고 자식을 키워온 가난했던 할머니는 삶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지혜로 만들고 계셨던거다. 

삶에는 지식도 필요하지만, 지혜가 더더더 많이 필요하다는걸 항상 생각한다. 아무리 지식이 차고 넘쳐도 지혜가 없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돌아보면 잘 알수있다.


효도하지 않는 할머니의 아들들.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에 아들편을 들던 할머니.

모든것이 지혜롭지는 않았던 할머니이지만

한평생을 작고 큰 예쁜것들로 채우고 싶어했던 우리 할머니가 오늘 이상하게 많이 보고싶다.

아마, 겨울옷들을 정리하며 꺼낸 할머니의 스웨터때문일것이다.

할머니, 이옷 제가 잘 입고있어요.

하늘에서도 행복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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