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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git Mar 03. 2022

업보 봉다리

콩과 팥을 정리했어야지

썬룸에는 올해의 업보가 가득 담긴 대형 비닐봉지가 하나 있다. 지난 늦가을 콩과 팥을 수확해서 커다란 비닐봉지에 그걸 모조리 넣어놓고는 겨울 내내 콩, 팥을 털지 않고 그냥 두었다. 매번 부엌에서 추운 썬룸을 바라보며 마치 남의 일인 듯 “조만간 콩… 털어야지…”하고는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었다. 


콩이 얼마나 되려나 싶어서 슬리퍼를 신고 썬룸으로 나가서 비닐봉지를 쓱 들어 올려보았다. 어머나 이게 웬일… 창가 쪽에 둔 비닐봉지 아래쪽에 물이 고여서 아래쪽 콩깍지들이 썩어가고 있다!  창가에 습기가 차고 물방울이 맺히고 비닐로 타고 들어갔나 보다. 


아 정말이지 나란 인간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아이고… 이렇게 썩여 없앨 거면 아예 심지를 말어라 말어! 뭣하러 땡볕에 농사를 짓냐!’ 중얼중얼 나 자신에게 잔소리 겸 반성을 하며 두꺼운 후드티에  작업용 조끼를 겹쳐 입고 앞치마를 두르고 나와 콩을 까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거 아닌 거 같던 콩 까기도 조금 하다 보면 힘들다. 깍지를 까면 깔수록 손가락에 꽤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손가락 관절이 욱신 아파진다. 그림 그리려면 손을 아껴야 하는데, 그런 것까지 따질 여유가 지금은 없다. 

업보를 왜 이리 쌓아두었는지 변명을 좀 해보자면 원래는 커다란 고무대야에 넣고 나뭇가지로 팡팡 때려서 털 요량이었다. 작업실에 있는 큰 고무대 야안에 물건이 가득 차 있어서 좀 미뤘고, 그 이후로는 날이 추워서 좀 미뤘다. 시간이 너무 지나니 그냥 손으로 까야지 뭐~ 생각했었다.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데 그 작업이 이리 귀찮은 일일 줄이야. 콩줄기에서 콩이 든 깍지를 찾아내고 그걸 뜯어내서 콩깍지를 까고 그 안의 콩을 한 곳으로 모은다. 이 자루 안엔 콩도 있고 팥도 있고 결명자도 있다. 거기에다 콩도 여러 가지 종류의 콩이 들었는데 그걸 분류하는 건 다음에 해야겠다. 꽤 오래 콩을 깠는데도 아직도 많이 많이 남아있다. 약간 콩털기 지옥에 당첨된 느낌이다. 이것이 모두 너의 죄이니라- 속죄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까거라! 귓가에 소리가 맴돈다. 처음엔 한 서너 시간이면 까지 뭐! 했는데 까도 까도 콩깍지는 줄지 않는다.   

계속 콩을 까니 손은 익숙해졌지만 눈은 심심하다. 어디를 치우면 좋을까 하고 썬룸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천장 이곳저곳에 매달린 뿌리 배추 시래기를 발견했다. 수확해와서 바로 뿌리와 잎 부분을 분리하고 뿌리는 잔 뿌와 흙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깎아 엄마 아빠 드시라고 드렸던 커다란 개성배추. 줄기를 시래기로 먹으려고 매달아 두었는데 노랗게 잘 마르고 있다. 삽으로 배추를 캐왔던 날도 엄청 지쳤었는데 시들까 봐서 낑낑대며 뿌리를 정리했다. 엄마 아빠께 가져다 드렸더니 “어릴 때 겨울에 간식으로 먹던 배추 뿌리 맛이 난다. 어릴 때로 돌아간 거 같다”며 좋아하셔서 뿌듯했었다. 뿌리 배추처럼 이 콩들도 아무리 지쳐도 그때 바로 정리했어야 하는데,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밭일이 많아 지친 데다, 제주에 그림을 가지러 가는 일까지 겹쳐버리는 바람에 미루고 미루다가 이 상태가 된 거다. 

먹으려고 심는 건데, 다시 심으려면 미리 정리했어야 하는 건데 정말 쉽지가 않다. 아직 잡지 않은 호박도 세 개나 남았는데 콩도 이리 남았다. 한숨을 쉬며 콩을 까고 또 까는 시간. 뭘 해 먹으면 좋을까? 생각하며 괴로움을 달랜다. 우울한 마음엔 즐거웠던 시절 생각, 요리 생각, 먹는 생각이 최고다. 


일 년 동안 농사를 이어가는 과정은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과 비슷하다.  

봄, 텃밭을 계획할 때는 뭘 해도 다 잘할 것 같은 마음, 뭘 심어도 즐거울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밭만 생각해도 즐겁고 조그마한 씨앗만 바라봐도, 아니 이 씨앗을 구하려고 구매하기 버튼을 클릭할 때도 최고의 수확을 상상한다. 씨를 흙속으로 쏙 밀어 넣고 그다음 주에 만나게 될 작은 초록색 떡잎은 상상만 해도 사랑스럽다. 행복은 가득하고 부담 하나 없이 가볍고 신나는 마음이었다가 여름이 되면 무한대로 자라는 작물과 잡초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수확할 만치 수확하고 허리 한번 폈다가 상추를 보면 다시 그만큼 자라 있다. 한여름 주변 지인들에게 “상추 좀 따갈래?”라고 연락을 하면 친구들 반응도 똑같다. “야.. 우리 집에도 넘쳐나… 너야말로 좀 정리해다가 닭 좀 가져다 줄래?” 하고 답한다. 가을로 가면서 잡초 정리며, 순을 쳐주는 거나, 벌레를 잡는 일도 해야 한다. 이제는 하기 싫은 일, 없었으면 했던 일들이 생겨도 꾸준히 돌봐야 한다. 책임감이 커지는 만큼 귀찮은 일들도 더 많이 생긴다. 노린재를 잡고 달팽이를 잡는다. 비가 오거나 해가 너무 쨍해도, 아니면 찬 바람이 불 때에도 참고 필요한 일을 하며 지치지 않아야 한다. 여름과 가을의 밭 이야기는 마치 오래 사귀어 안 만나면 불안하지만 만나면 좀 지겨운 마음이 드는 연인에 대한 험담 같다.  

초겨울, 날이 추워도 의무적으로 밭 정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냥 알아서 이별이 아니라 작물들을 때맞추어 걷어내고 정리하고 봄에 수확할 마늘이나 양파 같은 것들을 심기도 해야 한다. 웬만한 작물들을 모두 수확하고 먹을 것과 남길 것을 잘 분류해두어야 그 계절의 밥상이, 내년의 봄이 즐겁다. 가을걷이를 끝낸 후 남은 열매와 씨앗들을 잘 정리해서 씨앗으로 쓸 것과 먹을 것을 나누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 이렇게 힘들고 지치는 순환고리를 매년 겪으면서도 봄엔 기억도 못한다. 맛나게 먹었던 것, 즐거웠던 농사 순간만 기억한다. 그러니 또 농사를 짓고 하는 거겠지만. 연애하느라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다신 연애 안 해! 하고 울부짖다가도 금세 사랑에 빠지는 모습과 농사를 생각하는 내 모습이 비슷하다.


콩을 털면서 별 생각을 다 한다. 그냥 밭에서 슬슬 다 해왔으면 좋았을걸, 한겨울에 이게 뭐람.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이 업보 덩어리들을 빨리 정리하고 싶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콩밥이 먹고 싶다.

멸치 맛국물를 심심하게 내서 맛난 된장을 풀어 끓인 시래기 된장국이 먹고 싶다. 

뜨끈 달달한 붉은 단팥죽이 먹고 싶다. 


내가 수확한 예쁜 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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