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입 속의 정원

by Velinastra
고양이 입 속의 정원.png


프롤로그


병실은 겨울 햇살로 가득했다. 엄마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낡은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옛날 옛날에, 모든 씨앗을 품는 고양이가 있었대."


아이는 힘겹게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회색 고양이가 창턱에 앉아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 고양이의 황금빛 눈동자가 아이와 마주쳤다.


"엄마, 저 고양이 이야기야?"


엄마는 창밖을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아마도."


창가에서 마지막 낙엽이 떨어졌다.
아이는 눈을 감았다.


첫 번째 숨


눈을 뜨자 붉은 햇살이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고양이가 아이 앞에 앉아 있었다. 사람만큼 큰 몸집. 눈동자 안에서 수많은 작은 별들이 부유하듯 회전하고 있었다. 각기 다른 빛으로 깜빡이며.


고양이가 입을 열었다.


손바닥만 한 정원이 펼쳐졌다. 부드러운 이끼가 혀를 덮고, 작은 나무들이 잇몸 사이로 뿌리를 내렸다. 은빛 실처럼 가느다란 분수가 목젖으로 흘러내렸다.

고양이가 숨을 쉬었다.

꽃들이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정원 곳곳에는 시간의 흔적들이 있었다. 시든 꽃들, 썩어가는 낙엽들, 그리고 세월을 품은 나무들. 나무들의 껍질에는 옅게 새겨진 이름들. 아이는 그 글자들을 읽을 수 없었다.

"여기서 살아도 될까?" 아이가 물었다.


고양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눈을 감고 숨결을 흘려, 아이를 따뜻한 어둠 속으로 감쌌다. 그 어둠 속에는 흙냄새, 꽃향기, 그리고 지난 시간의 향이 섞여 있었다.


뿌리내리기


아이는 고양이의 혀 위에 첫 씨앗을 심었다.


손끝에서 흙으로 스며든 씨앗이 은은히 빛났다. 싹을 틔웠다. 작은 노란 꽃이 피어났다.


두 번째 씨앗에서는 푸른 잎을 가진 작은 나무가 자라났다.


세 번째는 보랏빛 풀이 되어 이끼 사이사이로 돋아났다.


씨앗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정원은 푸르러졌다. 뿌리 하나가 더 깊이 파고들 때마다 고양이의 귀가 뒤로 젖혀졌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목구멍에서 낮은 소리가 새어나왔다가 멈췄다.


정원의 분수가 잠시 끊겼다가 천천히 흐름을 되찾았다.

아이는 느꼈다. 고양이의 입 안 공기가 때때로 떨리는 것을, 침을 삼킬 때마다 정원 전체가 흔들리는 것을.


"아프지?"


아이가 뿌리를 어루만졌다. 뿌리들이 손길을 따라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고양이의 숨이 편해졌다.


"다른 아이들도 있었어?"

아이가 나무의 껍질을 쓰다듬었다.

"셀 수 없이 많았지."

고양이가 말했다. 그 소리는 땅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어?"


"봐."


고양이가 숨을 깊이 들이쉬자, 고목 사이로 어스레한 빛들이 번졌다. 각각의 빛 속에서 다른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웃는 얼굴, 우는 얼굴, 잠든 얼굴.


"나무가 되어 여기 남았지. 동시에, 별이 되어 내 눈 속에도 머물러 있어."

엄마의 목소리


멀리서 누군가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말이었다. 그러다 점점 바람 소리처럼 변했다. 정원의 풀잎들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고양이의 수염이 떨렸다. 그 떨림이 공기를 타고 정원 곳곳의 이슬에 맺혔다. 아이가 이슬을 만지자 손끝에서 엄마의 온기가 느껴졌다.


"조금만 더."

아이가 말했는지, 아니면 바람이 그렇게 들렸는지 알 수 없었다.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빠르게. 고양이가 낮게 신음했다. 아이는 당황해서 나무의 줄기를 감쌌다.


"천천히, 천천히."


나무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성장을 늦췄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바람 소리가 또다시 귓가를 스쳤다. 이번에는 더 가까웠지만,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말의 형태를 잃고 정원의 분수 소리와 섞여갔다.


고양이의 온몸이 긴장했고, 정원이 요동쳤다.


마지막 꽃


아이는 정원 깊숙이 들어가 고양이의 목 안쪽 벽에 손을 대었다.


둥-둥-둥.


진동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정원이 자랄수록 고양이는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양이는 아픔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마치 오래 기다려온 것처럼.


"나 때문에 아픈 거지?" 아이가 물었다.


고양이가 눈을 떴다. 황금빛 홍채 속 별들은 느리게 회전하고 있었지만, 이전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탄생은 언제나 아픔을 데리고 오지."


고양이가 속삭였다. 목소리에는 지친 듯하면서도 묘한 만족감이 배어 있었다.


아이의 눈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잠시 후, 정원 한쪽에서 붉은 꽃잎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노란 꽃, 푸른 꽃. 꽃들이 정원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고양이 입 전체가 향기로 가득 찼다.


봄날의 달콤함과 가을날의 쓸쓸함이 함께 섞여 있었다.


씨앗이 되어


아이는 마지막 씨앗을 심었다.

가장 크고 단단한 씨앗이었다. 씨앗이 싹트자 정원 한가운데 큰 나무가 솟아올랐다.

처음에는 발끝이었다.
흙 속으로 스며들 듯 무거워졌다. 발을 들어올리려 했지만, 뿌리가 발목을 감싸고 있었다.

그다음은 손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가느다란 새순이 돋아났다.

피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매끈하던 표면에 나이테처럼 결이 생겼다. 자신의 팔을 쓰다듬었다. 나무의 결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낯설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바람도 없는데. 위를 보니 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끝에 작은 잎들이 돋아났다.

아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여전히 아이였다.

고양이는 마지막으로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정원은 숨결에 완전히 맡겨졌다. 나뭇잎들이 고양이의 혀끝에서 바스락거렸다.

그 소리는 엄마의 자장가처럼 들렸다.


나무가 된 아이는 고양이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별들이 마지막으로 한 바퀴 돌고 멈췄다. 새로운 별 하나가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고양이가 눈을 감았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의 평화로운 잠이었다.

나무는 계절을 맞아 꽃을 피웠고, 수많은 씨앗을 만들어냈으며, 그 씨앗들은 바람을 기다렸다.


에필로그


나무가 만든 씨앗들이 고양이의 숨결과 함께 흩어졌다.


수천 개의 작은 씨앗들이 고양이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가 바람을 탔다. 어떤 씨앗은 병실 창문으로 들어갔고, 어떤 씨앗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병실에서 엄마가 아이의 차가운 손을 잡고 있었다. 창문으로 봄바람이 불어왔다. 작은 씨앗 하나가 실려 와 엄마의 뺨을 스쳤다.

창밖에서 첫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회색 고양이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했다. 입 안에는 여전히 정원이 있었다. 세월을 머금은 나무들과 시든 꽃들 사이, 우뚝 선 새로운 나무가 정원 전체를 굽어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눈을 깜빡였다. 황금빛 홍채 속에서 별들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새로운 별 하나가 오래도록 빛을 머금고 있었다.

고양이는 익숙한 자리로 돌아갔다.
창턱에 앉아, 창밖의 새싹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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