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elopenspirits Apr 04. 2024

고서 앞에서

휴직 93일 차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사유의 방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 유명세를 너무 탄 사유의 방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서 고요히 사유하지 못했다. 온 김에 박물관을 돌아보기로 했는데, 너무 방대해서 세 개층 전부는 보지 못하고 2층만 관람하고 왔다. 2층 서화관에서는 서화, 불교미술, 목칠공예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눈을 끄는 유물들과 예술작품이 많았지만 한 고서가 눈을 사로잡았다. 조선시대의 책자라 당연히 한자로 쓰여있었고,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동안 그 책 앞에서 발길을 떼지 못했다.

     

     쇼케이스 앞에서 멈춘 이유는 순전한 궁금증이다. 고서는 말 그대로 옛날 책이다. 책은 여러 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하필, 많고 많은 페이지 중에 왜 저 페이지를 펼쳐놓았는지가 궁금했다. 첫 번째 추측은 이렇다. 저 페이지가 한 권의 책 중에 가장 핵심적이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거다. 두 번째 추측은 이렇다. 저 페이지가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그나마 보존상태가 가장 훌륭해서다. 세 번째 추측은 이렇다. 한쪽만 펼쳐 전시하면 계속 빛에 노출이 되어 그 페이지만 바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일정 주기로 페이지를 넘기는데 내가 왔을 때는 하필 저 페이 지였던 것이다.


     도슨트가 있다면 고서는 어떤 기준으로 펼쳐서 전시하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도슨트 안내 시간은 종료되어서 정답은 알 수 없었다. 마침 브런치 앱에서 어제 쓴 글의 조회수가 7천이 넘었다는 알림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메인페이지에 내 글이 올라와있었다. 그냥 가볍게 쓴 일기일 뿐인데 전 국민이 다 보는 포털에 올라오면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당황스럽기도 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 쓸걸, 오타 검수도 좀 철저히 할걸 하며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궁금하다. 카카오와 브런치 에디터는 어떤 기준으로 내 글을 선정한 걸까? 브런치에 쓴 글을 종이책으로 만든다면, 그리고 그 책을 전시한다면 어떤 페이지를 펼쳐서 대중에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생각도 해봤다. 작가 velopenspirits의 내면을 가장 잘 나타내는 글? 가장 작품성이 있는 글? 아니면 그냥 기분 따라 아무렇게나 펼쳐서 나오는 글?


     카카오와 브런치의 기준은 알 수 없다. 많은 생각 끝에 어렵사리 고백한 글들은 반응이 없지만, 휴직기간 동안 그나마 일상의 루틴을 지키자며 약속했던 일기, 자기 전 잠시 끄적였던 글들은 에디터의 선택을 받았다. 내가 나랍시고 심오하게 썼던 많은 글들보다 어쩌면 지루한 하루하루와 사소한 순간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했던 글들이 정말 나답고, 가치 있고, 모두와 함께 하는 소중한 유산일 수도 있겠다.


여긴 사유의 방
매거진의 이전글 수영장 텃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