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 사람 때문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말했지만, 상담사는 나를 들었다

by velopenspirits

이별 후 가장 먼저 찾은 건 친구도, 술도 아닌

바로 상담실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좀 독특했다.

그는 브런치 글을 통해 나를 알게 됐다.

그의 친구가 내 글을 읽고는

'너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어'라고 나의 브런치를 소개했고

그는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당시 나의 글들은 대부분 어둡고 회의적이며 자조적이었다.

나조차 부끄럽게 여겨 노심초사하던 그 글들을 읽고도 정말 잘 썼다고 말해준 사람.

그래서 나는 믿었다.

예쁘지 않은 글을 읽고도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 사람은

어쩌면 나의 어두운 면까지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시작된 만남, 현실은 달랐다.

처음 몇 주간의 데이트 동안 나는 그에게 이름조차 숨겼다.

그건 어떤 악의라기보단 낯선 사람 앞에서 모든 걸 드러내는 게 조심스러워서였다.

또 글에는 나타나지 않은 나의 이면이 그의 기대를 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속일 순 없는 법.

사귀자는 그의 고백에 나는 모든 걸 털어놓고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만약 그가 나에게 실망해 관계가 끝났다면 이 책의 첫 페이지는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시작됐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서사의 시작이었다.


그래, 속인 건 어쨌든 내 잘못이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종잡을 수 없는 그의 감정선이었다.

그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썼던 날

“너무 잘 썼어. 감동이다”라고 말한 그는 며칠 뒤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왜 내 얘기를, 다른 사람들이 보는 데 올리냐”며 화를 냈다.


그의 말과 애정은 기분에 따라 달라졌다.

어떤 날은 새로 이직한 회사의 대표를 이상하리만큼 찬양했다가,

또 어떤 날은 전 직장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퍼 나르며 화풀이를 했다.

그의 감정이 바닥을 치는 날에 나는

새벽이든 버스 안이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20년이 넘은 남사친도 조심하라고 했던 그가

정작 본인은 나에게 아무 말도 없이 여사친과 술을 마시기도 했다.


앞뒤좌우가 다른 말들.

방향타를 어디로 잡아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

분명히 저쪽에서 잘못한 것 같은데,

논점을 벗어나 억지를 부리는 것 같은데,

사과를 받아야 할 내가 미안하다고 말을 하게 되는 이상한 결론이 계속됐다.


이 연애사가 상담실로 발걸음 하게 된 계기였다.






첫날, 상담사는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셨어요?”

나는 말했다.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 같아요.”

“나르시시스트에게 걸린 것 같아요.”

처음엔, 그렇게 오직 연애가 이유라고 생각했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욕을 실컷 하면

상담사는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이 상담실 문을 열기 전 상상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대화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헤어진 남자친구 때문에 상담을 받으러 왔다고 말한 나에게

상담사는 당연하게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간의 갈등은 어땠는지,

이별의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차분히 물었다.

이야기를 쭉 들은 상담사는 내가 그에게 이름을 숨겼던 사실에 집중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에는 연애뿐 아니라 회사에서도, 가족 안에서도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회사에선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일개미로 살았다.

낮에는 휴대폰 건강앱에 만보가 찍힐 정도로 동분서주했고

퇴근 후에는 욕을 하는 상사의 전화를 받으며 집으로 향했다.

잠시 숨을 돌리려 화장실로 피하면 사람들은 거기까지 쫓아와 일을 던졌다.


일을 나눌 수 있는 동료는 없었다.

누군가는 엎드려 자고 있었고

누군가는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 눈에 불을 켜고 있었고

누군가에게는 말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회사생활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서는 가구처럼 지내고 싶어요”

항상 거기 있지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기대받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존재.

있는 듯 없는 듯 기능만 수행하고 감정은 없는 딱딱한 존재.


게다가 아빠는 법적 문제에 휘말려 있었고 해결은 나와 동생의 몫이었다.

그 어떤 곳에도 기댈 수 없었다.

내가 약해지면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위태로워질게 뻔했다.

그래서 힘들 때 쓴 글을 봐주는 사람에게 빠지게 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연애 안에서만큼은 편안함을 찾고 싶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살아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곳은 나를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일, 연애, 가족, 나 자신— 모든 방향에서 압력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내놓지 못한 채 안으로만 삼키고 있었다.

지친 마음, 자기 소멸감, 존재에 대한 포기가 조용히 내 안을 잠식했다.

그때는 그렇게라도 살아야만 억울함과 분노에서 나를 분리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그 남자는 계기였을 뿐.

나를 상담실로 이끈 건 오래도록 쌓인 고단함과 말할 수 없었던 고요한 절망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상담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내 안에 쌓여 있던 침묵과 검열의 패턴을 마주 보게 되었다.

상식이라 믿었던 감정의 흐름을 상대방이 무너뜨릴 때

나는 매번 '내가 뭘 잘못한 걸까' 하고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 상황에서 싸우거나 벗어나기를 주저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이때만 지나면', '나만 참으면' 하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지냈다.


스스로를 돌볼 힘조차 없어진 그 시기.

마음의 배터리가 깜빡거릴 때 마지막 남은 힘으로 나는 상담실로 향했다.


알고 있었다.

첫 회기 때 연애문제로 상담실에 왔다고 했지만 그 문제 만은 아니었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진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낸 건

문제의 원인을 안이 아닌 밖에서 찾아야 숨을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각기 다른 여러 문제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때는 의식하지도 못했고, 솔직하게 직면하는 힘이 부족했다.


상담사의 입에서 가스라이팅, 나르시시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왜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왜 죽은 가구처럼 지내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안으로만 움츠리는 게 더 문제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때의 충격은 마치 단순 감기겠지라며 안일한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는데,

죽을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의 심정과 같았다.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나를 말하지 못한 건 단순한 거짓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유일한 방어막이자 익숙해져 버린 삶의 태도였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죽음 문턱까지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의 원인이 진짜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계기처럼 보이는 일들은 그저 표면에 불과할 뿐이며

진짜 문제는 저 깊은 곳에서 숨죽이며 알아채주길 기다리고 있다.


나를 상담실로 이끈 건 지나간 연애가 아니었다.

바로 나였다.


그걸 알아차리는데 3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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