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검사가 말해 준 나, 진짜일까?
“악마요.”
카드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보인 걸 말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오답을 말한 것처럼 아팠다.
나는 지름길을 믿었다.
MBTI, 심리검사, 보고서, 알파벳과 수치로 나를 알 수 있으리라고.
상담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로샤검사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로샤검사란 잉크 얼룩이 찍힌 카드 여러 장을 보여주고
보이는 걸 말하는 반응 속에서 무의식, 정서 상태, 사고방식의 단서를 찾는 검사다.
"심리상담도 결국 무의식을 알아가려고 하는 거잖아요."
"상담도 상담이지만, 심리검사도 같이 하면 더 빨리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상담사는 되물었다.
"빨리 아는 게 왜 중요한가요?"
"검사지표가 말해주는 당신이 정말 당신이 맞을까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수도 있지만 그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상담사의 충고에도 심리검사를 꼭 받아보고 싶었다.
당장 MBTI만 봐도 ‘맞아 맞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
전문가들이 들러붙어 온갖 검사로 나 하나쯤 분석하면
내가 어떤 인간인지 당장 알 수 있을 텐데,
끝도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시간과 돈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상담을 시작하고 반년 뒤, 결국 우울증 치료를 받게 되었다.
진단 목적으로 시행한 종합심리검사 항목 중에 로샤검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애착 카드에서 비정상 반응이 나왔다.
로샤 외 다른 검사들도 나를 설명했다.
왜 어떤 일은 별 노력 없이도 잘 해냈는지, 왜 어떤 건 죽어라 노력해도 안 되었는지.
30만 원을 들여 받은 종합심리검사 보고서는 내 마음의 성적표 같았다.
그래프와 용어는 현재를 또박또박 적어 줬지만 미래까지 비춰 주진 못했다.
그토록 원하던 검사를 받았지만 마음의 균열은 줄지 않았다.
휴직을 하고 발리로 떠나며 캐리어에 가장 먼저 챙긴 건
다름 아닌 종합심리검사 보고서였다.
여행 중 보고서를 찬찬히 읽으며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디서 비롯된 건지 분석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발리에서의 두 달간, 단 한 번도 그 종이를 펼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봤다.
정답지를 덮자 비로소 빈칸이 보였다.
낯선 곳에 혼자 있는데도 왜 이렇게 행복한지,
부당한 일에 화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뭔지,
요가를 하다 갑자기 눈물이 터진 건 왜였는지.
여행을 마치고 의사에게 찾아가 말했다.
“두 달 동안 발리에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했는데 아직도 모르겠어요.”
의사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내가 누군지 그만 알아봐도 되지 않을까요?”
정말 그만 알아봐도 될까?
아니면 평생을 고민해도 끝내 알 수 없다는 걸 의사는 돌려 말한 걸까?
나이가 들면서 MBTI도 바뀌었다.
우울로 인해 일부 지표가 이전보다 낮게 나왔다.
맥락이 달라지면 내 답도 달라졌다.
그림검사에서 집을 다시 그려보라고 하면 이제는 발리의 한 방갈로를 그리고 싶다.
검사가 나를 어떻게 말할지는 내가 어떤 걸 보여주느냐에 달렸다.
나의 대답으로 정답이 바뀌는 정답지...
그곳에서 유일한 답은 가변성뿐이다.
"검사지표가 말해주는 당신이 정말 당신이 맞을까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수도 있지만 그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상담사도, 의사도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는 말을 했다.
직접 부딪히는 쪽이었다.
빨리 아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재촉한다고 깨달음이 오는 것도 아니었다.
정답(이라고 믿는 것)이 있든 없든 그건 본질이 아니었다.
낯선 곳에 혼자 있는 게 오히려 더 행복했던 건
모든 걸 오직 내 의지로 결정하고 책임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완벽해야 만이 타인에게 화를 낼 수 있다는 이상한 강박이 있었다.
"당신의 마음에 귀 기울여 보세요"라는 요가 강사의 뻔한 말에 눈물을 흘린 건
내 속에 아직 슬픔이 가득한 탓이었다.
어떤 사람은 매일매일 조금씩 자신을 돌아봐서,
어떤 사람은 직관이 좋아서 적은 노력으로도 자기 성찰이 가능하다.
하지만 나처럼 병으로 휴직을 하고, 전기도 잘 안 들어오는 섬에서 넘치는 시간을 가진 뒤에야 겨우,
미뤄둔 숙제 하듯 자신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결국 직접 생각해 보고, 마음 한가운데에서 표류해 봐야 한다.
그러니 심리검사를 할지 말지, 언제 할지, 그 결과가 어떤지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도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발리 여행의 마지막 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점심을 먹었다.
나는 그에게 나를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빗대어 말했다.
왜 하필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떠올렸을까.
마음은 다른 과학 분야와는 다르다 했으면서
왜 긴긴 여행의 끝에 한 사고실험이 떠올랐을까.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 속 고양이는 뚜껑을 열어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다.
즉, 관측하기 전에는 결과가 확정되지 않는다.
언제나 명확한 답을 말하는 다른 과학실험과 달리 마음을 다루는 과학은 좀 다르길,
더 나은 미래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길,
변화의 틈을 볼 수 있길 바랐다.
보고서는 삶의 단면을 또렷하게 비춰 주지만,
앞으로 펼쳐질 관계와 선택은 그 의미를 계속 바꿔 놓는다.
그래서 검사는 유효하지만 최종본은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서두르지 않고 상자 곁에 오래 앉아 매일 조금씩 들여다보고 싶다.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순 있어도 내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확정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