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들 잘 사는 것 같아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는 말로 들려요

by velopenspirits

“상대에게 확신이 없으면 나를 드러내지 않았어.

그런데 그게 내 실수였던 거 같아.

나를 보여주지 않는데 상대가 어떻게 나를 안아줄 수 있겠어.”


친구가 내 말을 듣더니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전, 운전을 하다가 어떤 사람이 갑자기 도로로 뛰어드는 바람에 큰 사고를 냈다고 했다.

그 사람은 만취 상태였고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고 무모하게 돌진해 왔기에 피할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친구는 그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아직도 가지고 있었고

누군가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렵사리 과거를 털어놓은 친구의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어떤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한숨만 쉬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가 달리 보였을 것이다.

‘사람을 그렇게나 다치게 했다고?'

'그걸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있었던 거야?’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거면 너무 불안하지 않을까?’


친구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많은 이야기를 했다.

종이에 하나하나 그날의 일을 적어가며 말이다.

하지만 나의 시선이 머무른 곳은 펜을 든 손끝이 아니었다.

그의 눈빛이었다.

자신의 가장 약한 기억을 꺼내 놓는 친구의 모습 말이다.






친구가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하지 않아도 됐지만

난 그가 굳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맥락을 알고 있다.

나의 약한 점을 꺼내놓는 만큼,

상대도 나를 믿고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낼 수 있다는 말에 자기를 감추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친구는 헤어지며 말했다.

“오늘이 너무 후회돼. 네가 나랑 이제 연락 안 할까 봐 무서워.”

나는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건 진심이었다.

친구가 과거를 꺼낸 순간,

그가 나에게 신뢰와 용기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함께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았다.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이 정도까지 얘를 이해해 줬는데,

이 사람도 언젠가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안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제는 나의 감정을 엄격하게 검열하지 않는다.

그건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기대이자 바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나의 말에 상담사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다 괜찮아 보인다고요?
그 말이 지금까지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는 말로 들려요.


그 말이 한동안 내 안에 울렸다.

나는 정말 그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집안 이야기, 친구랑 싸운 이야기, 이성에 대한 고민 등을 시시콜콜 이야기할 법한 어릴 적에도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잘해본 적이 없다.


감정을 나눈다기보다는 해결중심적 사고가 익숙하기도 했고,

나에 대한 정보를 줄수록 그것이 나중에는 화살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렇게 묻어만 두던 고민, 울분, 화는 결국 마음의 병이 되었고,

그걸 안고 찾아간 상담실에서 나는 처음으로 모든 이야기를 솔직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담실 밖에서도 조금씩 나를 꺼내보았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말이다.

며칠째 화장실을 못 가고 있다는 이야기,

모두가 좋아하는 연예인이지만 나는 싫어한다는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그동안 이런 사소한 이야기조차 드러낼 용기가 없었으니 마음이 아픈 건 당연했다.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크게 울고 웃으면서 힘든 이야기,

쪽팔린 이야기, 멍청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동안 내가 전혀 몰랐던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밝기만 한 줄 알았던 친구는 공황장애를 겪고 있었고,

잘난 남편과 알콩달콩하게 사는 줄만 알았던 친구는 이혼을 고민했었다고 했다.


더 놀라운 건, 그들의 반응이었다.

조심스레 털어놓은 속마음에

“언니는 솔직할 때가 제일 매력적이야.”

“네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너의 신념이 꾹꾹 눌러 담겨 있는 것 같아.”

“너는 스스로 시행착오를 무수히 겪으면서 단단한 삶의 자세가 만들어진 사람 같아.”

라는 말을 해줬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 마음을 울린다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친구도 있었다.


그때 알았다.

숨기고만 싶었던 나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더 보고 싶은 나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친구의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오래전 사건에 대해 말한 걸 후회한다 했지만

오히려 난 그 친구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다 생각한 엄청난 일,

친구가 겪은 일 자체보다는 그걸 나에게 털어놓기로 한 마음의 흐름을 먼저 바라본 것은

아마 상담실에서 익힌 관계의 감각이 내 안에 스며들어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물었다.

“그 사건을 아는 사람들 중에, 네 옆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왜 그런 거 같아?”

친구는 대답했다.

“그건 아마 나도 불가피한 사고의 피해자이고

무엇보다 내가 그들에게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모두가 크고 작은 고통을 품고 있다.

단지 그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말할 수 없어서 더 조용히 앓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말보다는 글이 편하고,

또 다른 사람은 단 한마디를 꺼내는데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깊은 관계에는 함께 한 시간, 그리고 서로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서로가 내보였을 때 그를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그걸 내보이는데 죄책감과 수치심을 덜어낼 때 서로에게 기댈 수 있다.


친구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평가 대신 당신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묻고,

어떤 실수를 했는지 집중하기보다는 어떻게 책임지고 있는지를 먼저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다독여주려 한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

내가 감추고 싶은 일이 오히려 대체불가한 나만의 강점이었다.

친구의 고백도 마찬가지였다.

치부라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꺼낸 순간, 마음은 친구를 향해 더 기울었다.

흠이라고 생각했던 파임은 사실 관계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 틈을 비집고, 비로소 서로를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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