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따뜻함이 그리웠나 봐요
대학생 때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동생이 나에게 말했다.
"언니, 제발 짝 좀 봐!!!"
동생이 봐도 답답할 정도로 연애에 소질 없었던 나였나 보다.
그 동생은 남자들이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어떻게 해야 이성의 관심을 얻을 수 있는지 짝을 보고 좀 배우라고 조언했다.
그 아이의 조언을 한 귀로 흘린 탓일까,
결국 10년 뒤 나는 남자와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다가 차였다.
그와는 코로나가 극심했던 시기에 만났다가 코로나가 끝날 때쯤 헤어졌다.
당시에 내가 큰 수술을 받았던 이유와 코로나로 바깥활동의 제약이 많아서
자연스레 데이트는 거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수술 후 회복으로 한동안 성관계를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른 활동들로 재미있었다.
요리부심이 있는 그는 장을 잔뜩 봐와서 스테이크를 굽고 파스타를 만들었다.
한 번은 기름에 튀긴 계란이 제일 맛있다며
팬에 올리브유를 통째로 붓고는 주방을 기름바다로 만들어놓았다.
그와 나는 운동을 좋아했다.
그는 근손실 때문에 유산소 운동은 싫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나를 위해 함께 자전거를 타기도 했으며, 집 근처의 작은 산에 올라가기도 했다.
본가인 공주를 다녀오면 그는 뒷산에서 주었다며 밤을 한 아름 안겨주었다.
그러면 나는 그걸 삶아 반으로 가르고
숟가락으로 밤을 열심히 파서 그의 앞접시에 놓아줬다.
짜릿한 스파크는 없어도 소소한 일상의 행복감만으로도
충분히 우리 사랑이 커져가고 있다고 믿었다.
회복기가 지나도 우린 섹스를 하지 않았다.
수술 후에 그도 몸 회복이 우선이라며 배려해 줬고
나도 무리하고 싶지 않지 않아 굳이 성적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의문이 들었다.
'왜 잠자리에 대해 아무 말도 없지?'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다가 조심스레 그를 향해 손을 뻗어봤지만 그는 반응이 없었다.
“왜 모른 척해?”
내가 묻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마디.
“헤어지자.”
갑자기, 여기서, 이 상황에 이런다고?
그는 말했다. 내가 친한 동성 친구로 느껴진다고.
이성적인 감정이 사라졌다고.
더 듣고 싶은 말이 많은데, 하고 싶은 말도 많은데 이불 모서리만 만지작 거렸다.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 끝에 걸터앉았을 때 그는 이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사랑했던 이유인 끈끈한 정, 가족 같은 포근함, 동지애가
오히려 그가 나에게 이별을 고한 이유라니.
이성적인 설렘도 당연히 좋지만 어차피 그건 오래가지 못해 사라질 감정이라 생각했다.
사랑을 지속하게 하는 건 짧은 두근거림을 넘어선 긴 따뜻함이라 여겼다.
만약 성관계가 자주 있었다면 우리는 좀 더 오래 만날 수 있었을까?
하나도 안 뚱뚱하다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몸매든 피부든 관리했다면
좀 더 여성적인 매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 이별 이후로 데이트를 하면 살이 찌니까,
그러면 그놈의 여성적 매력을 잃을까 봐 연애가 하기 싫었다.
우리는 동상이몽이었다.
그에게서 가족의 온기를 찾던 나, 나에게서 설렘을 원했던 그.
두근거림이 익숙함으로 느껴지는 연애의 변화를 겪으며
그는 사랑이 끝나감을 느꼈고, 나는 반대로 사랑이 무르익는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애의 결실은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혼을 결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상대에게 정착해 안정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정, 동지애, 친밀감이야말로 사랑의 정점에서 가질 수 있는 감정 아닐까?
가족의 따뜻함이 그리웠나 봐요.
이별 이야기를 들은 상담사가 말했다.
그 말이 아팠다.
가족의 따뜻함을 가족에서 찾지 않고 엉뚱한 데서 찾으려고 한다는 지적처럼 들렸다.
기본적인 온기와 안전의 부족을 드러내는 듯했다.
메슬로우 욕구 5단계설을 빌리자면,
하위 욕구가 채워진 후 상위 욕구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긴다.
만약 사랑에도 층위가 있다면, 가족의 사랑 위에 연인의 사랑이 놓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연애에서도 이성적 끌림보다 안전함과 포근함을 먼저 찾았다.
반대로 기본적인 애정과 소속감이 충분한 사람들은
연애에서는 그것을 다시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적 이끌림, 도파민 같은 상위 욕구를 찾을 것이다.
상담사의 말이 아프게 다가온 이유는 그 안에서 내 결핍을 직면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욕구의 층위를 갈망하느냐에 따라 사랑의 무게중심이 결정된다.
이별통보에 남자친구를 안으며 펑펑 울었다.
“으이구... 남자친구랑 처음 헤어져봐? 조금 지나면 다 괜찮아지는 거 알고 있잖아.”
그는 헤어지면서도 나를 어린아이 다루듯 달래줬다.
그 순간에도 화가 나기는커녕, 토닥여주는 그의 품에서 이상한 따뜻함을 느꼈다.
이별의 말과 보듬는 손길이 치열하게 모순되는 순간에
내가 그에게 끝내 느낀 건 분노와 원망이 아닌 고마움이었다.
그와의 연애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회식 후 술에 잔뜩 취해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예고도 없이 집으로 찾아온 밤이다.
비닐 안에는 편의점에서 파는 마카롱이 들어 있었고 꼬부라진 혀로
“너 이거 좋아하잖아~, 이거 주려고 왔어.” 라며 말했다.
나는 그를 앉혀놓고 해장라면을 끓여주었다.
지금도 편의점에서 그 마카롱을 보면 그날이 떠오른다.
화려한 데이트보다, 편의점 냉장칸 속 찌덕한 삼색 마카롱이 더 오래 남았다.
작은 마카롱에서 술에 취해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 오던
어릴 적 아버지의 소심한 사랑표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별 후엔 다이어트도 하고 화장도 열심히 했다.
2025년 버전 짝, 나는 솔로도 열심히 봤다.
짝을 보면서 남자공부 좀 하라고 했던 동생의 말을 들었더라도 나는 차였을 것이다.
내가 공부해야 할 건 남자들이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가 아니었다.
남자를 알기 이전에 나의 결핍과 내가 서 있는 욕구의 층위를 먼저 살펴봤어야 했다.
그리고 상대의 그것들도 찾아봐야 했다.
서로가 서있는 사랑의 층위가 다르다면
그 계단의 높이 차이만큼 서로를 바라보지 못할 테니까.
사랑을 오래 이어주는 힘이 설렘인지, 따뜻함인지 단언하지 못한다.
사랑을 오래 이어주는 힘은 결국,
서로의 결핍과 충족을 알아보고 그 차이를 감싸 안는 마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