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인 거 알죠?
몇 달이나 고민했지만 차마 뱉지 못했던 그 말,
'헤어지자'라는 단 네 글자를 뱉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마지막 다툼에서 보았던 그의 눈빛이었다.
익숙한 그 눈빛.
당장 내 말을 인정하라는 강압적인,
여기서 더 세게 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눈동자에 담긴 힘은 분명했지만 그것이 결코 인간적인 생기는 아닌,
그건 바로 화가 났을 때 아빠의 얼굴에서 보던 눈이었다.
이별의 허전함보다 오래 남은 잔상은,
가장 싫어했던 아빠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그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었던 건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익숙함은 증오도 이기는 걸까.
그렇다면 난 그 익숙함을 어떻게 벗어날까.
드라마 미생에서 꼬불머리 김대리는 소개팅 후에 거절을 당한다.
“별로 이기적으로 보이지 않아서 싫어요."
"저희 아버지가 그런 분이라 저희 어머니가 힘든 걸 보고 자랐거든요."
노란 외투의 여자가 떠나자 김대리는 혼자 중얼거린다.
"이기적이지 않은 게 사랑받지 못할 이유구나."
분노에 찬 눈빛보다는 사람 좋은 너털웃음이 나을 텐데...
못돼서가 아니라, 착해서 싫다는 복에 겨운 거절 사유.
그 잣대를 나 역시 휘두르고 있었다.
그에게서도 가끔 아빠의 모습을 본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어리숙하다 느낄 만큼 책임감이 강하다.
사흘 밤을 회사에서 지새웠을 땐,
왜 이렇게 약게 굴지 못하나 하는 답답함도 느꼈다.
"그 과장은 맨날 칼퇴하는데 왜 너만 밤새는 거야?"
답답해서 외친 이 한마디에는
이 사람이 손해만 보는 사람이면 어쩌지 하는 내 걱정 지분이 반이었다.
성실하고 이해심 넓은 그의 모습은 분명 좋은 점이다.
하지만 내 안의 필터는 그 모습을 무력함, 바보스러움으로 해석한다.
가끔은 내 안에서도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꾸준히 엄마는 나를 보고 느그 애비랑 똑같다고 비꼬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힘 역시도 그 애비가 가진 강점과 닮았다.
끈기, 지능, 집요함 같은 좋은 면이 분명히 있었다.
그 사람이랑 아버지랑 다른 사람인 거 알죠?
닮음은 같음이 아니다.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말이다.
남자친구들도, 나도, 아빠도,
모두 다른 사람이라는 자명한 상담사의 한 마디는 나의 의식 구조를 흔들었다.
각자의 시간과 배경을 존중하고
그 사람 자체를 받아들인다는 마음이 바람직하다는 걸 알지만
여전히 나는 아빠 필터로 세상을 흐릿하게 본다.
안 좋은 점은 죄다 아빠를 닮았다고 하는 엄마의 말에 반기를 들면서도,
타인에게 나도 똑같이 굴었다.
그 습관은 상처의 잔재이자, 같은 고통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레이더다.
필터를 해제하는 게 진짜 나를 위한 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미생에서 그 여자가 잔인하고도 솔직한 거절을 했던 것처럼
나도 레이더의 경고를 받아 미리미리 쳐내야 하는 건지 말이다.
촉이, 조상신이 그렇게 신호를 줬는데도
그걸 무시하고 내 팔자를 내가 꼬는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남아있다.
남자가 이기적이지 않아 싫다던 여자는 정반대의 남자를 만나서 행복했을지가 궁금하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건 참 고된 일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았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어딜 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그 흔적이 모든 것을 불투명하게 만든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나와 그는 다른 사람이다."
이 문장들은 어쩌면 누군가를 향한 미움을 사그라들게 하기 위한 명제 같다.
그 누구를 만나도 미워하는 부분이 보인다면
그 누구보다 괴로운 건 다름 아닌 나일테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되새긴다.
모두 다른 사람이다.
사람 좋은 웃음을 봤을 때도, 분노에 찬 눈빛을 봤을 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