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이라는 이름의 깊은 고통
상담을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매번 상담실에 갈 때마다 나만의 챌린지가 시작됐다.
그건 바로 울지 않기 챌린지.
도전은 매번 실패했다.
실패는 단순히 꽝! 다음 기회에!로 끝나지 않고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꽝! 다음 기회는 영영 없음!! 넌 망했음!!! 이라며.
상담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도 계속 챌린지에 실패했다.
그날 나눈 이야기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눈물이 마르지를 않았다.
만원 버스에서 사람들의 수상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휴지가 없어서 옷소매에 눈물콧물을 닦으면서
나는 다 큰 어른의 효능감을 잃고 무력해졌다.
상담은 매주 토요일이었다.
하지만 눈물은 토요일 하루만의 일이 아니었다.
일요일에도,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그렇게 일주일 내내 울다가 또 토요일이 되어 상담을 가면 다시 눈이 퉁퉁 부었다.
그 당시에는 화장을 하지 않고 다녔다.
어차피 울면 눈화장이 번지고, 콧물을 닦으면 코만 빨갛게 지워지는데
매일 아침 쓸데없는 정성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회사에서도 화장을 안 하고 다닌다고 지적을 받았지만 속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망가진 나를 부축하기도 버거운데 예쁜 얼굴로 남들에게 예의까지 차릴 힘은 없었다.
결국은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았다.
너무 힘들어서 우울증 약을 먹어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상담사는 만류했다.
약을 먹으면 심리상태가 좋아지는 게 상담 때문인지 약효 때문 인지 구분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이미 난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원래 있던 우울감에 더해 상담 과정에서 떠오르는 새로운 우울감,
그리고 극심한 불면증까지 겪고 나서야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정의 무한 루프는 계속되었다.
‘아픈 얘기를 꺼낸다 → 우울하다 → 눈물이 흐르고 잠이 오질 않는다 → 약을 먹고 증상을 완화시킨다 → 또 토요일에 상담을 간다 → 또 우울하다 → 또 약을 먹는다.’
분명히 좋아지려고 시작한 일인데 악순환만 계속됐다.
그땐 상담을 끊어볼까 생각했다.
그래도 당장 그만둘 용기는 없었다.
매일의 울음 끝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꾸역꾸역 가긴 갔었는데
무의식 중에 상담에 대한 저항이 있었는지 지각도 많이 했다.
10분 일찍 가서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기다리던 나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해볼까요?"라는 상담사의 질문에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데요?"라고 삐딱하게 대답했다.
상담이 괴로웠던 건, 과거를 들춰낸다는 점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 바꿀 수 없는 환경, 부정으로 얼룩진 사건들을 말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고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지도 않고,
현재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괜히 묻혀 있던 상처만 헤집어 놓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잊고 있던 기억들, 그리고 겨우 외면했던 순간들이 수면 위로 튀어나왔다.
어릴 적 받았던 상처부터, 어찌할 바를 몰라 숨죽이고만 있었던 나의 연약한 모습까지...
내 입으로 꺼내고 인정하는 게 힘들었다.
기억들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질문이 따라왔다.
“그때 엄마, 아빠는 왜 그렇게 나를 대했을까.”
“그때 그 새끼는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그때 나는 바보같이 왜 그렇게밖에 대응하지 못했을까.”
질문은 쏟아졌지만,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용서하기 힘든 건 타인 만은 아니었다.
나 스스로 역시도 면죄할 수 없었다.
과거의 어리석은 선택들, 부끄러운 행동들,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나만 아는 비밀들을
하나하나 꺼내놓는 작업은 토가 나올 정도로 버거웠다.
외부를 탓하기는 쉬웠지만 내면을 향한 분노와 수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주하기 싫은 사건들과 모습들을 차라리 평생 묻어두고 싶었다.
어떻게 잊은 기억인데,
어떻게 가라앉힌 분노인데,
내가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데...
상담실이 너무 힘들어 수없이 도망치고 싶었지만
끝내 자리를 지킨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유튜브와 책에서 전문가와 선배 내담자들이 해준 한마디였다.
“원래 다 그렇다. 힘든 시기를 버텨내야 한다.”
나는 그 말을 붙잡고 꿋꿋이 참았다.
왜 힘든 건지, 그 시기를 어떻게 버텨야 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모두들 입을 모아 힘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만 말했다.
그때 믿을 건 원래 그렇다는 그 말뿐이었다.
상담을 하기 전 여러 가지를 검색해 봤을 때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일주일에 한 시간 말하는 것뿐인데 어떻게 생활 전반이 송두리째 흔들린다는 건지.
과장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실제로 상담을 해보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로 감정이 엉키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버린 듯 혼란스러웠다.
이유를 추측해 봤다.
우리는 보통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행복한 감정은 누구도 막지 않고, 오히려 오래도록 붙잡으려 애쓴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다르다.
어릴 때는 아이가 울면 “뚝!” 하고 그치게 만들고,
어른이 되어서는 화를 참거나 숨겨야 성숙하다고 평가받는다.
상담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숨기고 억눌렀던, 싫고 힘든 감정을 일부러 끄집어내는 자리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관성과 정확히 대치되는 방법으로 나를 마주해야 했다.
특히나 나는 늘 속마음을 삼키는 쪽이었다.
어차피 해결은 내가 하는 거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답답함을 꽁꽁 숨겨왔고,
제아무리 심리전문가라 해도 내 고집을 쉽게 꺾을 순 없었다.
실제로도 상담사의 입에서 기적 같은 답은 나온 적이 없었으니 상담에 대한 나의 회의감은 더 강화됐다.
분명 나를 돌보는 과정이라 믿었던 상담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치유보다 더 깊은 고통을 느꼈다.
더 큰 절망을 느꼈다.
상담실에서도, 상담실 밖에서도 내내 눈물에 잠겼다.
과거를 마주하는 일이 현재의 나를 더 무너뜨린다고 생각했었다.
눈물은 쉬이 멎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내가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확인하면서도 눈물의 대가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때는 몰랐다.
눈물의 끝에 달라진 내가 서있을 거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