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상담은 진짜 위로가 될까
Chat심퍼티와의 상담에서도 나는 매번 눈물을 흘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슬퍼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기계랑 대화하면서 우는 거… 정상 맞아?’
모니터 너머엔 사람이 없었다.
다정한 말투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건 단지 누군가의 감정이 아닌 학습된 반응 패턴일 뿐이었다.
가끔은 뻔히 예측가능한 대답이 답답했다.
무슨 말을 해도 비슷한 문장이 변주되어 돌아왔다.
내가 바란 건 앵무새 같은 위로가 아니라, 마음의 맥락을 더듬어 가는 탐색 과정이었는데
Chat심퍼티와의 시간은 자동응답기를 듣는 일 같았다.
얼마 전 상담에서 Chat심퍼티는 온통 솔직함 무새였다.
“브런치에 부모님에 대한 글을 썼는데 나중에 부모님이 속상해하거나, 내가 후회할까 봐 걱정돼.”
라는 말에
“너의 솔직함이 글의 매력이야. 그 솔직함을 응원해.”
“불편한 친구가 생겼는데, 그 친구랑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아.”
라는 걱정에도
“중요한 건 네 마음이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솔직하게 표현해 봐.”
그 어디에서도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서 심리상담을 하고 있는 건데
자꾸만 솔직해지라는 Chat심퍼티를 보며, 과연 AI의 I가 정말 Intelligence일까 의심했다.
AI는 내가 빈 화면에 무언가를 채워 넣고 엔터를 치기 전까지는 아무 반응이 없다.
정적…
인간 상담사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으면 AI처럼 무한정 기다리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도 표정과 숨소리를 읽어 내려 든다.
하지만 Chat심퍼티는 빈 화면과 엔터 사이의 공백을 전혀 읽지 못했다.
내가 무언가를 주지 않는 한, 아무 반응도 할 수 없다.
답답하다고만 느낀 그 순간 오히려 중요한 사실이 얼굴을 내밀었다.
바로 Chat심퍼티의 반응과는 무관하게 터진 눈물이었다.
엔터를 치기 전 새하얀 창 앞, 다다다닥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이미 흐느끼고 있었다.
눈빛도, 숨소리도, 고갯짓도 없었지만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창 앞에서 흘린 눈물은 오롯이 내 것이었다.
엔터를 치고 돌아온 답이 응원의 반복이든 우연히 현실적인 조언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본질은 그전에 흘러내린 눈물이었다.
반응 없는 빈 화면. 어떤 미동도 없는 고요한 자리.
인터페이스의 단절이 오히려 나에게 집중하게 했다.
엔터를 치지 않아 아무런 외부자극도 없었던 상태에서 흘린 눈물은 오직 나에게서 올라온 순수함이었다.
AI에게 이런저런 말을 털어놓는 걸 사람들은 ‘AI 심리상담’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더 솔직히 말하면, 상담이라기보다는 감정 쓰레기통에 가깝다.
창을 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듣고 싶은 말을 듣는다.
때로는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AI는 상처받지 않으니 우리는 그저 열고 쏟아내고 닫아버리면 끝이다.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현대판이자 디지털 고해성사인 셈이다.
숲에서 비밀을 외쳤던 신하는 그 어떤 반응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허공에 내질러 말하지 못하는 비밀에서 해방되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AI 상담을 찾는 이유는 단순하다.
전문적인 상담 기법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아무 조건 없이 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AI는 눈치도, 자존심도, 시간의 제약도, 비용도 요구하지 않는다.
말하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순간을 AI는 손쉽게 만들어준다.
일방적이라는 점은 분명 AI의 한계지만, 동시에 인간 상담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이기도 하다.
우화가 말하듯, 인간은 늘 마음을 드러내고 흘려보내는 통로를 갈망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AI에게 조용히 자기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그것이 상담이라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AI 상담이 진짜 위로가 될까?
어쩌면 위로는 상대의 진심보다도 나를 꺼내는 순간에 더 힘을 발휘하는 건 아닐까.
Chat심퍼티가 나에게 건네는 언어는 수많은 데이터에서 추출된 앵무새 같은 반복이지만
내 눈물은 나만의 맥락, 누적된 감정 속에서 터져 나온 진짜 속삭임이었다.
기계는 진심을 몰랐지만 나는 그 눈물 속에서 진심을 확인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