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푸른밤
항상 여행의 시작은
밑도 끝도 없는 ok, go! 로부터
지난 겨울 제주 땅을 밟았던 이유도 다를게 없었다. 갈까요 갈래 가요 가자! 겨울의 한라산이 또 그리웠기에 한치의 고민도 없이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근데 이게 웬걸. 공항 문을 빠져나오니 조금 더운 제주의 겨울 날씨에 설렘이 걱정으로 바뀌었다. 한라산이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이 되어있으면 어째? 도로를 달리는 중에 한라산이 눈에 스칠 때면 하얀 정상을 찾기 바빴다.
그렇게 조바심 나던 하루가 지나고. 둘째날 아침 공기는 많이 차가웠다. 그리고 햇살은 충분히 따사로웠으므로 전날의 걱정은 잊기로 한다.
구불구불 꽤나 긴 가로수길을 지나 영실휴게소에 발을 내딛었다. 아직 녹지 않은 얼음 알갱이들에게 안부를 묻고나니 정말 안심이다. 자, 이제 오르자! 바사삭 발 아래의 칼날들이 얼음을 가르는 소리가 점점 힘차게 들려온다.
어떤 이야기
한라 영실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 제주를 만든 설문대할망이 오백명의 아들을 먹일 죽을 끓이다 그만 큰 가마솥에 빠져버렸지. 집에 돌아온 아들들은 잘 끓인 죽을 맛나게 먹은 후에야 할망을 찾을 수 있었어. 이 사실을 안 아들들은 한없이 슬피 울다 그 자리에 몸이 굳어 저기 영실을 둘러싼 바위들이 되었고.
발끝을 부드럽게 감싸던 눈을 구경하던 참에 듣게 된 이야기였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본다. 저 멀리서 하얀 숲길을 할망과 아들들이 지켜주고 있었다.
달과 사막
두어시간쯤 지났을까. 이젠 작은 나무들조차 보이지 않는다. 모자란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턱을 오르자 믿을 수 없는 시공간 속에 서로가 서 있었다. 달에 가면 이런 기분일거야.
우주가 펼쳐졌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우주였다. 아니 눈 덮인 사하라의 사막이라고 해두자. 바람이 흩어 놓은 흔적이 곳곳에 가득했다.
어린 아이의 키만큼 소복히 쌓인 눈은 등산로와 숲의 경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던 작은 나무들이 내 발 아래에 숨어 있었구나. 눈밭 위 모든 이들이 무작정 뛰고 달리고 굴렀다. 나 역시 발자국이 끊기는 지점까지 달려나갔고 그 어디에도 정해진 길은 없었다. 제주로 들어오는 비행기만이 파란 하늘에 길을 만들고 있을 뿐.
떠나보내기
다른 계절이었다면 잠깐의 풍경으로 스쳐 지나갔을 여기겠거니. 한 겨울의 놀이터를 떠나기 싫었다. 윗새오름을 돌아 나오는데 자꾸만 뒤를 보게 된다. 남벽을 보지 못한게 이내 아쉽기도 하고. 떨어지는 해를 피해 다시 일상처럼 바쁜 걸음을 하고 있는 우리가 밉다.
안녕. 잘 있어 영실.
다시 올게.
딱히 목적도 목표도 없었다. 무엇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많이 그리웠던 제주와 한라와 나의 사람들이 있어 떠날 수 있었던 지난 겨울의 이야기로부터.
#150214 #2월의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