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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리 Sep 24. 2015

Op._편지 by 츠지 히토나리

도쿄 이노가시라 공원

젠가 누군가의 글을 읽고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당신 글은 오프닝파 같아요.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면 시작할 때 흘러 나오는 여는 노래를 좋아하는 오프닝파와 가끔은 중간에 잘려서 방영되기도 하는 닫는 노래를 좋아하는 엔딩파로 사람이 나뉘곤 했다. 나는 엔딩파에 속했는데 오프닝이 밝고 경쾌하다면 엔딩은 잔잔하고 여운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내 오프닝은 언제나 어색하기 그지 없다. 나는 엔딩파니까. (그렇다고 마무리를 찰떡 같이 한다고는 절대로 보장할 수 없다.) 하여, 첫 문장을 쓰는 마음을 이렇게 엔딩파 답게 질질 끌며 적어 내려가고 있다. 엔딩파는 느리고 돌아간다. (그리고 이 말은 암시한다. 책 읽는 방식도, 여행하는 법도, 또 그 둘을 혼합해서 적을 앞으로의 글들도 다분히 그리 될  수밖에 없음을.)


전 글에도 썼다시피 2015년은 나름의 안식년이었다. 그리고 그 안식을 위해 나는 세계'반'주를 떠났다. 술에는 안주가 있어야 하듯 (그 반주가 그 반주는 절대 아니지만;) 여행에는 책이 있어야 한다가 내 지론. 여행지를 결정하고 나서는 관련 책들을 찾아 읽으려 노력했다. 이미 읽은 책도, 읽고 있는 책도, 읽어 봐야지 싶은 책도 있었다. 갖고 있던 책도, 선물 받은 책도, 새로 산 책도 몽땅 이북에 담았다. '편지'는 책 속에서 여행지를 발견하는 기쁨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책이었다. 그래서 여행하며 책에서 헤맨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여는 글로 제일 먼저 이 책이 떠올랐다. 오프닝으로 택했지만 내 취향답게 상당히 엔딩파스러운 책이다.


가 좋아하는 책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작가가 누군지 이 글을 쓰기 위해 책장을 뒤적거리고 나서야 제대로 기억해 냈다. '클라우디'가 읽고 싶어 츠지 히토나리라는 이름을 외웠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쩌면 난 감쪽같이 저자를 이시다 이라로 여기고 있었을까. 무슨 책이 나왔는지 신문 광고나 라디오 CM으로만 알 수 었던 초등학생 시절, 신문에서 본, 아마도 고려원 출판사의 책이었을 거다, 저 책이 얼마나 읽고 싶었는지. 결국 기억 속에서 잊혔고 다시 기억해 놓고도 찾아볼 생각이, 아니, 이제는 읽고 싶은 마음 자체가 사라져서 읽을 수 없는 책이 됐다. 각설하고 작가의 이름이 익숙하다고? 그렇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그 작가 맞다.


편지를 대필하던 시절, 그러니까 지금부터 20년 전쯤의 옛날 이야기지만, 나는 JR 추오센 기치조오지역에서 이노가시라 공원으로 빠져나가는 골목-길 양쪽에는 꼬치구이집, 오래된 메밀국수집, 부티크, 부동산, 헌옷가게, 헌책방, 화랑, 선물가게 등이 빼곡히 들어차 사람들로 붐비는 한쪽에 방을 빌렸었다.

일본어로 편지란 한자는 손(手)과 종이(紙)로 되어 있다. 자세한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정말 그렇지 하고 감탄하고 만다.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편지가 사라지지 않는 건,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것만은 기계로 대량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편지는 완전한 수제품이다.

- 저자의 말(목차에는 '편지 봉투를 열기 전에'와 '추신'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중 발췌


(좌) 2006년 3월 31일 벚꽃이 한창인 이노가시라 공원을 걸으며 찍다. 공원을 포함한 기치죠지 일대는 [편지]의 배경. (우) 책 표지와 작가의 손엽서. 엽서 내용은 뒷면에 한글로 번역돼 있다.


금은 사라진 숙대 근방 작은 책방에서 책을 사서 펼쳐 들었던 순간이 기억난다. 불분명한 기억이지만 씌워져 있던 랩핑을 벗기고 하드 커버를 넘기자 작가 츠지의 손으로 쓴 듯 한 엽서가 팔랑하고 비어져 나왔다. 비록 인쇄된 엽서이긴 했지만 작가의 필체가 살아 있었다. 엽서 상단 작은 고양이도 귀여웠다. (고양이 미샤는 그의 대필가 시절 친구) 나는 이미 첫 장을 펴기도 전에 이 책에 마음이 뺏겨 버렸다. '(제목이) 편지(인 책)에 꽂혀있는 엽서라니.'라고 생각하며. 다시금 판권을 보니 2005년에 출간 됐다. 벌써 십 년 전이다.


치죠지 근처에서 길을 헤매다 들렀던 골목을 묘사했다는 확신을 들게 하는 장면이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 있다. 그 여행에서 이노가시라 공원도 함께 들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옛 사진 파일을 찾아보니 찍은 날짜는 2006년 3월 31일. 내가 가진 책이 초판본이고 분명 같이 찍힌 책도장 날짜를 보니 그 해에 산 게 맞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읽은 후에도 책의 배경이 된 장소를 다녀왔다는 뜻이다. 기억은 얼마나 흐리고 기록은 어찌나 명확한지... 여행과 독서의 기억은 이런 식으로 풍화되곤 한다. 또 하나 지금까지 나는 이 책을 단편집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저자의 말도 그렇고 츠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쓴 에세이었다. 그는 소설가야, 란 편견이 실재를 소설로 인식하게 만들었나. 책 속의 내용이 모두 있었던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저릿한 장이 한둘이 아니다. 


...보트는 재미있죠, 노를 젓는 사람의 뒤쪽으로 나아가니. 마치 인생처럼. - p.48 2장. 벚꽃이 피어요 중


지만 여기서는 두 번째 장, '벚꽃이 피어요'에 대해서만 써보려 한다. 예전 거닐었던 이노가시라 공원을 가장 기억나게 하는 화이기도 하고 위 사진을 볼 때마다 같이 연상되는 얘기기 때문이다. 유코는 3년 전 자신의 잘못으로 헤어졌던 옛 남자친구와 재회하기를 바라며 대필가였던 작가에게 의뢰를 한다. 하지만 전 남친인 타쿠야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생긴 후. 츠지는 교가를 매개로 유코가 바라던 식은 아니지만 둘을 화해시킨다. 


음에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단순한 소품으로 생각하고 한 번 휙 읽고 책꽂이에 꽂아놨다. 심지어 '아니, 이 작가는 왜 대필한 편지 끝에 계속 소설 작법처럼 이렇게 썼는지 일일이 설명을 달지'라며  짜증스러워했다. 하지만 벚꽃철만 되면 문득문득 '편지'가 기억이 났다. 여행지에서 읽었던 책을 다시 읽거나 소설의 배경이 된 여행지를 가 본 경우에는 해당 책도, 여행지도 각별해지는 듯하다. 책을 읽으면 여행지가 그려지고 여행지에 가면 책이 떠오른다. 두 기억이 하나가 된다. 2006년 봄에 이노가시라 공원을 거닐 때 술잔을 기울이며 꽃놀이하던 수많은 인파의 중앙에 있던 호수에서 보트를 타는 사람들을 보며 염려를 했다. 보트의 전설(?)을 책을 통해 이미 알고 있던 난 커플은 없는지 유심히 살폈던  듯하다. 그땐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사진 상에는 남자끼리 혹은 가족끼리만 타고 있다.


이노가시라 공원 호수에는 벤텐사마를 모셔둔 작은 섬이 하나 있다. 이 벤텐사마는 무척이나 질투심이 많은 신이라, 호수에서 연인들이 보트를 타면 시기를 해 헤어지게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p.34

기억하나요?
활짝 핀 벚꽃 아래서 징크스에 도전한다고 소란을 떨며 둘이서 보트 탔던 날을.
바람이 불면 꽃잎이 우리 고향의 함박눈처럼 날렸었죠. 타쿠짱은 벌떡 일어나 갑자기 교가를 불렀어. p.39

이노가시라 공원의 벚꽃 또 보고 싶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해낼 수 있어. 그래, 유코와 함께 보트를 탔던 것도 물론 기억하고 있지. 360도, 어디를 봐도 활짝 핀 벚꽃이었지. 그 벚꽃은 평생 내 마음속에 피어 있을 거야. p.43-44

나는 타쿠짱이 그랬던 것처럼 노를 보트 안에 올려놓고 조심조심 보트 위에서 일어났어요. 호수 주변의 왁자지껄 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든 다음, 자세를 바로하고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 타쿠짱과 신부에게 닿을 커다란 목소리로. 이건 내가 두 사람에게 보내는 응원가, 결혼 축가예요. p.49

- '츠지 히토나리의 편지' 중 발췌


공원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이 거리 안에 사이좋았던 시절의 두 사람 모습이 있어.

- p.175 9장. 마음의 풍경 중


 글을 쓰기 위해 벚꽃과 호수 이야기가 담긴 2장만 다시 읽어 보자고 책장에서 책을 빼들었는데 어느새 한편 한편 전 편을 읽어버렸다. 마지막 편까지 읽고 나니 그에게 손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이 순간을 잊지 말라며 그가 건넨 푸르고 푸른 엽서에 이번에는 반대로 나를 잊지 말라고, 그 순간을 기억해달라는 바람을 담아 꼭꼭 눌러 쓴 편지를. 오프닝파가 분명한 그에게 엔딩파의 느리고 돌아가는 방법으로. 두 송이 활짝 핀 벚꽃과 뒤에 가려진 붉은 봉오리 둘이 담긴 사진과 함께. 그가 사는 나라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푸른 빛이 담긴 엽서에, 그가 좋아하는 나라의 내가 가장 아끼는 꽃들이 담긴 사진을 핑계 삼아.


2006.03.31 이노가시라 공원에서 바람 불어 흩날리던 꽃잎들을 선명하게 찍으려 애쓰다 만난 고요의 순간을 담다. 꽃과 봉오리가 둘씩 포커싱 된 이 사진이 난 참 좋다.




. 세계'반'주를 시작하기 전 나가사키를 다녀왔다. 이 전에 한 번 갔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좋았고 당시에 못 간 그림책 박물관에 가고 싶었다. 또 근처에 엔도 슈사큐 박물관이 있다는 말에 '침묵'을 인상적으로 읽었던 터라 꼭 한번 들르고 싶었다. 게다가 그 박물관 일대가 침묵의 배경이기도 하다는 말에 더욱더 가고 싶었다. '침묵'&나가사키와 '편지'&이노가시라 공원 중 어느 이야기를 첫 글로 할지 고민이 됐었다. 결국 이어질 글의 결 등을 고려해서 편지 이야기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가사키 이야기도 하고 싶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 둔다. 앞으로 이야기할 장소와 책이 궁금하신 분들은 이 매거진의 목차에 해당하는 글을 읽어 보시길.


의 덧. 다 보니 이건 책 이야기도, 여행지 이야기도 아닌 그 주변 이야기만 잔뜩 인 글이 됐다. 뭐, 하지만 좋아하는 책 제목 중에 한강의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이 있는데, 사랑을 사랑이게 하는 건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듯 책과 여행을 더욱 반짝반짝 빛나고 아름답게 하는 것도 그 둘을 둘러싼 이야기 아니겠느냐고 말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그리고 어차피 이건 오프닝이라고, 본편이 아니라고. 처음에도 이 글은 분명 빙빙 돌아갈 거라고 밝혔으니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그러려니 이해해 주실 거라 믿는다. 그렇죠? ^^;;

 이렇게 에둘러 가는 오프닝을, 잘 부르지도 못하는 음치임에 분명한 노래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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