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0일간의 봄날
만약 여행을 다녀온 후 글을 쓰게 된다면 그 글의 제목은 ‘2015년, 100일간의 봄날’이 될 거라고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아직도 화창한 날씨를 온몸으로 느끼며 일어날 때마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여행하기 좋겠다, 어서 나가자.‘란 생각을 하며 일어나려다 ’여긴 서울, 내 방이지.‘라고 현실로 돌아오곤 한다. 깜둥이가 된 네파군(메인 가방 애칭이다.)을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은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 있다. 그래서인지 여행에서 돌아온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면 ‘꿈같다.’고 대답하곤 한다.
겨울에 떠났는데 돌아오니 서울은 한여름. 2015년 내 봄은 3개월 하고도 보름이었다. 늘 다니던 골목길을 따라 숙대입구역에서 집까지 돌아오는데 옷 가게 하나는 닫고 카페 한 곳은 이름이 바뀌었고 떡볶이 가게는 만두 가게가, 소품 가게는 피자 가게가 되어 있었다. 엄마의 김치찌개는 평소보다 맵게 느껴졌고 헤어 드라이기 바람은 약해졌다. 백일이란 시간은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는 기간이었다.
-2015년 5월 28일의 기록
2월 겨울이 한창일 때 더욱 추운 캐나다의 옐로나이프로 떠났다. 길다면 긴 여행의 첫 목표는 ‘오로라 관찰’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오로라와 함께 있는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여행을 떠나면 즐겁고 기쁜 시간들의 연속일 줄 알았는데 웬걸? 떠나기 전날 밤부터 챙겨야 할 것들 투성이었다. 메인 가방과 보조 가방의 무게 합을 10kg 미만으로 맞추려고 많은 물건들을 넣었다 덜었다 하고 여권과 바우처, 일정표들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걱정하실 부모님을 위해 여유 일정표를 뽑아서 냉장고 문 앞에 붙여두고 환전한 각 나라의 초기 사용 돈을 복대에 따로 채워두고 네 개의 신용카드 및 은행체크카드를 챙기고 SNS에 인사말을 남기고 나서도 과연 혼자서 백일을 잘 날 수 있을까 싶은 두려움이 앞서서 챙겨놓은 배낭을 보며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출발일 당일도 새벽부터 공항으로 향하면서 도착해서 해야 할 일들을 순서대로 정렬하느라 머릿속은 복잡했다. 핸드폰 로밍에서부터 액체류는 보안 검사하기 쉽게 잘 넣어뒀나 스스로가 의심스럽고 캐나다에 도착해서 숙소까지 어떻게 가지 싶기도 하고 그 전에 비행기 환승은 잘 할 수 있을까, 보낸 짐이 다른 곳으로 가 있으면 어쩌지, 항공사 마일리지 받는 것 잊지 말아야지, 와이파이 잘 터질 때 라운지 등 필요한 정보 미리 검색해 놔야지 같은 잔걱정들이 한 가득 이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여행을 결심하기 전까지의 고민이 더 엄청난 것들이었다. 10년 이상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계획을 알리고 거기다 일정 짜기는 멘붕의 시작. 가고 싶은 나라와 장소들은 대략 정해져 있었지만 너무 많아 탈이었다. 유럽도 서, 동, 북 다 가고 싶고 마다가스카르만 가고 싶었는데 경유할 수밖에 없는 항공 일정을 보니 케냐도 가고 싶어 지고 카미노 길을 가려고 보니 끝나는 지점에 모로코도 가면 좋다는 말에 혹했다. 이러니 가고 싶은 곳이 한정 없이 늘어나서 도대체가 루트와 일정이 나오지 않았다. 체력과 기간, 예산에 맞는 가지치기가 필요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점은 정말로 내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는 것이다.
가능한 한 곳에 오래 있고 싶었다. 현지인 같지만 빠듯하지 않은 시간관념을 지니고 움직이고 싶었다. 현지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백수 같은 느낌? 돌아보면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고 보고 싶은 곳은 많다는 욕심 때문에 관광객 모드였던 순간들이 훨씬 많았지만 아무튼 처음의 계획은 그랬다. 한 나라의 한 도시만 가서 한 달씩 있어볼까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가려는 나라들이 물가가 비싼 지역들이라서 도저히 그럴 재정적, 심리적 여유가 없어서 포기하고 타협을 했다. 여기에 내 자신의 체력과 상황을 고려해 여행을 반반씩 나눠서 가기로 결심했다. 보통 재정 때문에라도 ‘동->서’ 나 ‘서-> 동’의 한 방향으로 한 번에 여행을 계획하는데 그런 일반적인 룰을 무시하기로 했다. 한 방향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는 건 세계일주 항공권의 규칙이 그렇기 때문인데 저가 항공이 대세가 된 요즘은 굳이 그 규칙을 따를 필요가 없어 보였고 각 나라별 추천 여행 시기나 날씨를 고려해 세운 내 일정은 한 방향으로 갔다 다른 방향으로 되돌아오는 식이라 세계일주 항공권을 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짜다 보니 굳이 한 큐(!)에 휙~ 돌 필요도 없었기에 여행 중간에 한 번 한국에 돌아와서 밀린 일처리를 하고 휴식기를 거친 후에 다시 새로운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백일 간의 일정이 나왔다. 일명 ‘세계반(Half)주’의 탄생. 반주라 하니, 혹자는 악기 연주를 하며 여행을 하느냐, 세계의 술을 섭렵하는 그 반주냐,라고 묻기도 했지만, 그저 일주의 반, 1/2을 뜻할 뿐.
북미 1달: 캐나다 옐로나이프(오로라), 미국 뉴욕과 보스턴(뮤지컬, 모마, 월든 호수)
남미 1달: 페루(마추픽추), 볼리비아(우유니 사막), 칠레(발파라이소), 아르헨티나(달밤의 이과수 폭포)
터키 보름: 이스탄불,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영국 3주: 런던, 레이크 디스트릭트
아이슬란드 1주: 골든써클, 블루라군
체력은 반주로 어찌 커버했으나 또 다른 문제는 언어. 남미의 에스파뇰은 둘째 치고 영어회화도 중학생 수준이라 어쩌나 고민스러웠다. 게다가 첫 여행지는 영어권인 북미인데 혼자 다녀야 하니…. 하지만 이런 내게 용기를 주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터키항공 스탑오버를 위한 자정의 통화되겠다. 남미에서 영국으로 넘어오는 비행기표를 터키항공으로 정하고 보니 터키에서 스탑 오버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싼 항공권을 사려면 해외 여행사와 직접 통화를 해야 했다. 이 일을 겪고 보니 어떻게든 되겠지, 정신이 생겨났다. 그 날의 기록을 옮겨본다.
‘방금 엄청난 일을 했다. 전화로, 말도 안 되는 서바이벌 영어로 영국 여행사 직원의 도움을 받아 스탑 오버하는 항공권을 발권했다. 아, 인내심을 발휘해준 e-bookers의 인도 발음 물씬 나는 아저씨(청년?) 영업사원님 감사합니다. 이메일로 온 청구서에 텔레마케팅 비용으로 10파운드 청구됐는데 그분의 노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듯. 어쨌든 항공사에서 직접 사는 것보다 40만 원은 아꼈다. 올레~!
아, 허기져... 내 발음이 안 좋은지, 바다 건너온 선이라 자꾸 끊겨서 그런지 스펠 확인할 때 이런 식으로 했다. 'J like Juliet', 'A for Apple'. 집 주소까지 이런 식으로 확인하니 예약하는데 하 세월. 머리는 띵하고 배는 고프다.‘
-2015년 2월 7일의 기록
‘세계반주’라는 소박한(?) 타이틀도 정해지고 대략적인 발권도 완료하고 여행사진을 올릴 N드라이버도 개설하고 여행지에서 참고할 자료들도 블로그에 정리해 올리고 SNS에 여행에 필요한 소소한 물건의 후원요청을 올리고 해당 물품들을 받으며 사람들을 만나서 응원과 조언을 들으면서 시간이 흘러갔다. 그중에서 제일 힘이 됐던 말은 ‘여행지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말이었다. 현지 조달이 가능하니 모든 걸 다 준비해 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그 곳에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들이 산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밖에도 돈 벌기는 힘들어도 돈 쓰는 건 쉽다며 돈만 있으면 대개의 어려움이 해결되니 염려 말라는 조언도 있었다. 짐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 멘붕이 왔을 땐 건강만 챙기라던 말도 힘이 됐다. 하지만 난 자전거도 못 타고 수영도 못하는 몸치에 저질 체력의 대표주자. 반주를 계획한 이유 중에는 체력도 포함됐으니 말 다했다. 어쨌든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했는데 해결이 불가한 문제가 남았다. 길치 중의 상 길치인 내가 과연 무사히 원하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겠냐는 문제.
덧. 사실 체계적이고 일목요연한 차례를 지닌 글을 써볼까 싶어서 주루룩 쓸 이야기 거리를 적고 분류를 해보기도 했다. 키워드도 뽑아봤고 여행 후 만난 사람들의 질문들을 모아서 답변 글 형식으로 써볼까 다양한 기획(?)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계획 한들 100프로 그대로 진행되는 일은 흔하지 않다는 걸 여행에서 배웠기에 그 모든 목록들을 머릿속에만 남겨놓기로 했다. 기억에 남는 사람들, 풍경들, 일화들 등등이 서로 얽히고 설 켜서 발효가 되면 어떤 글이든 나오겠지 싶다. 나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내게 남미의 습속이 배었나 보다. 알게 모르게 백일은 긴 시간이었다. (그래서 아이들도 백일을 기념하는 걸까 싶기도 하고?)
01. 누군가의 소원리스트 (미션 예고)편
과 02. 상길치, 오로라 보러 먼길 떠나다편으로 이어집니다.
written by 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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