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마파리움_유리 지구본 위를 걷다.
(수정 중인 글)
보스턴은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이다. 물론 미식가들에게도, 역사광에게도 마찬가지 일 수 있다. 그만큼 상대적으로 짧은 미국 역사 가운데서도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작가들을 배출한 곳이다. 명문으로 알려진 하버드대와 MIT대도 보스턴에 있다. 역사 시간에 '보스턴 차 사건'을 배운 기억이 있는가? 미국이 독립 전 영국의 관할하에 있을 때 관세 때문에 제지를 받자 배에서 수 많은 차(Tea, not Car) 상자들을 바다로 던졌다는 보스턴이 바로 이 보스턴이다. 그 사건 때문에 미국 독립 운동이 격발 되었다고 한다. 사회 책에 있던 항구에 정박된 배 그림이 어렴풋이라도 떠오른다면 당신은 꽤나 범생 측에 들었던 사람. 몇십 년 전 수업시간에 들은 장소를 몸소 걸어 보다니 감격스러울 만도 했지만 기억할지 모르겠다, 2015년 2월 보스턴은 폭설 속에 있었다. 뉴욕도 눈이 꽤나 왔지만 보스턴은 교통마비 수준이었고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언론에 폭설주의보가 오르내렸던 때. 짓눈깨비가 흩날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메가버스를 타고 도착한 보스턴에는 내 키 만한 울라프 눈사람이 천하대장군처럼 도로 곁을 지키고 있었다. (사진 속의 울라프는 머리 부분이라 빙산의 일각이다. 그 밑으로 거대한 눈산이 숨어 있다.) 다행히도 눈은 그쳤지만 도로 곁에 정말로 산더미 만한 눈들이 쌓여서 빙빙 돌아 길을 찾아야 했다. 안 그래도 길치인데 찾아놓은 길로 가면 도로 통제라고 돌아가라고 하고 그러다 보니 다시 처음에 내렸던 버스정류장에 난 서 있고 울라프를 몇 번을 다시 만났는지 모른다. 숙소까지 15분 거리를 한두 시간은 돌면서 보스턴 외곽 지리를 강제로 익혔다. (이런 일은 그 후 대부분의 여행에서 반복적으로 겪는 일이 됐고;;;)
간신히 숙소를 찾아 짐을 풀고 3일 간의 짧은 일정이었기 때문에 바로 마파리움을 향했다.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 속 단편 '섹시'를 읽으며 유리 지구본이 무언지, 그 위를 걷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보스턴 여행 정보지에서 mapperium이란 곳이 있다는 걸 읽었는데 감 잡았다. '아, 여기가 소설 속 그 곳이구나.' 꼭 가봐야지 하고 위치를 확인해 뒀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센터- 톰 크루즈가 믿는다는 그 종교의 기념관이자 홍보관이다.- 내에서 가장 유명한 전시물이 바로 마파리움이고 소설 속에서 묘사된 곳이었다.
그들은 밝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 판으로 만들어진 방의 내부로 들어갔다. 지구의 내부 같은 모양이었으나, 동시에 지구의 외부처럼 보이기도 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투명한 다리가 있었는데, 거기에 서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그들은 다리 너머를 살펴보다가 발밑의 남극 군도를 보았으며, 목을 길게 빼고 머리 위의 커다란 금속 별을 쳐다보았다. 데브가 말을 하면 그의 목소리가 유리에 부딪혀서 심하게 반향 했다.
데브가 미랜더에게 다리의 한쪽 끝에 서보라고 말했다. 다리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는 9미터나 되지만, 서로가 속삭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아무 말이나 해봐요." 그녀는 그 말을 하는 그의 입술 모양을 지켜보았고, 동시에 들었다. 그 소리는 너무도 또렷하여 겨울 외투 속에서, 피부 속에서 느꼈으며, 또한 아주 가까우면서도 온기로 가득해서 자신의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안녕."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속삭였다.
"당신은 섹시해요." 그 말을 받아 그가 속삭였다.
-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 중 '섹시' p. 149-150 발췌
지구본의 내부에 들어가서 360도 상하 벽에 있는 세계지도를 보는 기분이다. 지구본 중앙에는 긴 유리다리가 끝과 끝을 연결해 주고 있고 문을 열고 그 다리에 들어서면 가이드가 먼저 간단한 주의사항과 설명을 전한 후 조명이 꺼지고 세계나라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컬러풀한 조명이 점등됐다가 약 5분 정도의 영상이 유리 지구본 내부 전체를 비추며 세계의 역사가 흘러간다. 관광객들은 약 30분 간 그 공간에 머물며 서로에게 이야기도 하며 소설에서 묘사한 것처럼 실험(?)을 해 볼 수 있다. 다만 사진 촬영은 불가.
"이게 바닥에 있었어요."
"옷걸이에서 떨어진 거야."
로힌은 그 드레스에 눈길을 주고 나서 미랜더의 몸을 바라보았다. "입어보세요."
그녀를 본 순간 아이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지퍼 채우는 걸 도와주겠니?" 그렇게 말하며 미랜더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로힌이 지퍼를 올려서 채워주었고, 그러자 미랜더가 일어서서 빙그르르 돌았다. 로힌은 연감을 내려놓았다. "아줌마는 섹시해요." 아이가 또렷이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니?"
"뭐가요?"
"그 말 말이야. 섹시, 무슨 뜻이니?"
아이가 갑자기 부끄러워하며 고개 숙였다. "말할 수 없어요."
아이가 입가에 손나발을 만들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그건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 중 '섹시' p.169-173 발췌
이 단편을 읽었을 때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가 떠올랐다. 계모 슬하에서 자란 아이가 자신이 다른 가정을 무너지게 하는 불륜녀가 됐을 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그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부분이 소재 측면에서 흡사했다. 자신이 유부남에게 빠져 있는데 같은 직장 동료의 사촌언니가 남편의 바람 때문에 고통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죄책감을 느끼는 부분도, 그 사촌 언니의 아이인 로힌을 하루 돌보며 데브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모습도 큰 그림은 비슷하다. 하지만 제목인 '섹시'에서 나타나듯 이 단편에서는 단어의 정의가 큰 역할을 한다. 인용한 부분을 보면 데브에게 들은, 미랜다를 사랑에 빠지게 한 단어가 로힌에게는 아빠가 엄마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할 때 사용하는 단어인 것이다. 미랜다는 로힌의 섹시란 단어 정의에서 자신의 행동과 감정에 따른 파장을 실감한다.
덧. 이번 매거진의 덧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