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0일간의 봄날
02. 상길치, 오로라 보러 먼길 떠나다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오지의 소규모 지역공항이라 그런가 건물 밖 허연 색 옐로나이프란 글씨와 건물 안 한 마리 북극곰 동상이 안팎으로 썰렁하게 여행자를 맞는다. 여기는 영하 30도. 안경에 김이 서리자마자 얼어서 앞이 안 보인다. 옐로나이프는 선주민이 노란 칼을 들고 있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오로라 빌리지 웰컴 킷에 북쪽에 가까이 왔다는 인증서도 있고 멀리 오긴 왔다.
같은 비행기 타고 온 다른 한국인 부부는 밸런타인 기념으로 왔단다. 아아, 난... 계속 다른 동행 없냐고, 혼자 왔냐고 비행기 탈 때마다 물어봐. 심지어 입국심사할 땐 왜 혼자냐고;; (나도 그 이유를 알고 싶다. ㅜㅜ) 면세점에서도 밸런타인 분위기 물씬 나는데 이 커플들 사이에서 오로라 빌리지에 혼자 묵어야 한다. 쳇, 그래도 난 오로라와 나 사이를 가를 게 아무것도 없어, 흥. 다만 김서린 안경이 막을 뿐;;;
-2015년 2월 13일의 기록
그렇다. 나는 용감무쌍하게 밸런타인 데이에 맞춰서 혼자 오로라 여행을 온 것이다.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당연히 아시겠지요, 들?) 계획 세우다 그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땐 의미도 있고 재미날 거 같다고 생각했더란다. 마침 요청받은 미션 중에 오로라와 내가 함께 찍힌 인증사진도 있었는데 거기에 2월 14일이란 날짜가 같이 찍혀있으면 더 좋을 거 같았더랬다. 그리고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보름달을 피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혼자 놀기 좋아하는 나일지라도 느끼는 고독(이라 쓰고 절망이라 읽는다.)과 질문들과의 싸움이었다.
심지어 밴쿠버 공항으로 가는 길엔 밸런타인데이 맞이 인터뷰를 당할 뻔했다. 길 건너에서 인터뷰하길래 쳐다봤더니 새벽이라 사람이 없어 옳타쿠나 싶었는지 '하이!'하며 카메라를 내 쪽으로 들썩였었다. 비행기 시간도, 영어도 걱정이라 도망갔는데 생각해 보니 외국 텔레비전에 나올 수 있는 기회였다. 내 밸런타인 데이 계획은 혼자서 오로라 보기예요, 이러면 필 방송 탔을 텐데 말이다. (쓰고 나니 좀 슬프다.)
도착 첫날인 13일(무려 금요일! 어쩜 이리 딱딱 맞게 날을 잡았을까나.)엔 흐리고 오로라가 레벨 1 정도라 육안으로는 안보였다. 바람도 엄청나게 불어서 전망대 언덕에서 눈바람 맞다가 티피에 있다가 레스토랑과 기념품샵 오락가락하고 아이스쇼를 보니 3시간 반이 훌쩍 지났다. 아이스쇼는 바나나, 오이, 두부 등으로 못 박고 물에 젖은 옷이 바로 굳어버리는 쇼. 그리고 대망의 밸런타인 당일 나는 이러다 오로라 못 보는 건 아닌가 살짝 염려가 됐다. 90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볼 수 있다기에 오로라 빌리지에서 3박만 할 계획이었기에 시간이 없었다. 호텔 근처 마켓에서 단풍잎 기념 캔디랑 과자 등등을 한 아름 들고 왔다. 오늘이 밸런타인 데이란 걸 다시 한 번 진열대에서 확인하며 제발 커플 저주 안 할 테니 오로라 좀 뜨길 기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어코 '(옐로나이프에) 왔노라, (오로라를) 보았노라, (커플천국을) 이겼노라.'란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함께 오로라를 기다리는 기쁨을 주려고 했나. 여행 온 유학생들과 함께 자정 전에 밝고 환하고 아름답고 신기한, 이 세상의 현상 같지 않은 오로라를 맞을 수 있었다.
오 마이 갓과 스고이 사이에서 우와 예쁘다, 를 연발했다. 가이드 분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오로라라고 했다. 'awesome, great, incredible, fantastic, amazing!' 어떤 형용사와 감탄사로도 설명이 안된다. 오로라 커튼이 너울 거리면서 눈 앞에서, 머리 위에서 휘몰아치는데, 와~와~란 말 밖에 안 나온다. 사실 어제 구름이 하도 많았기에 오늘도 비슷한 하늘에 걱정을 하며 머스콕스의 언덕에서 토론토와 LA에서 온 청년들과 얘기를 하고 있는데 머리 위로 북두칠성이 뜨면서 별이 점점 많아지는 거다. 청년들이 라면 먹으러 간 사이 혼자 의자에 앉아서 하늘을 보는데 오로라 쇼가 급 시작됐다.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참고 보다 일단락됐다 싶어서 내려왔는데 또 다시 더 강하게 몰아쳤다. 이번엔 머리 위 하늘에 오로라가 해파리 속에 내가 갇힌 듯이 온통 쫙 퍼져서 펄럭이는 거다.
정녕 이것이 당신이 만드신 세상입니까. 기도해 준 분들 모두 고마워요. 땡큐, 갓! 역시 절 실망시키지 않으시는군요. 완전 앞으로 더 잘 할게요... 등등 갖가지 생각도 함께 들다 나중에는 경이로움 외엔 무엇도 안 남더라. 구름 뒤에 숨겨져 있을 뿐 오로라는 태양이 있는 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상.
그리고 오늘의 착한 일은 옆방 사람들에게 치약 빌려준 것. 그러니 내일도 오로라 부탁해요, 네?
-2015년 2월 14일의 기록
언덕에서 내려오자마자 잽싸게 미션 완수를 위해 오로라 빌리지 사진 서비스를 이용해 인증을 시도했다. 2월 14일이란 날짜와 오로라와 내가 당당히 한 장에 찰칵, 담겼다. 하지만 신은 공평한 분인가. 세상에 오로라 못 본 사람들의 한이 사진사의 손을 붙들었나, 얼굴이 지못미라 인증미션 요청자에게만 공개할 수 있는 사진이 됐다, 엉엉. 그래도 어쨌든 오로라는 봤고 미션도 성공!
첫 번째 미션 수행 완료!
니나- '나는 무슨 자연현상인가'에서 오로라로 등극했으니 오로라 사진 찍어 줘용.
로망의 성취 1. 오로라 보기
(전체 미션 리스트는 01. 누군가의 소원리스트 편 참고.)
written by 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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