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버티게 해 준 시간들
안녕하세요. 오늘도책한잔 박기량입니다.
저는 매일 꾸준히 무언가를 이어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 가지를 오래 붙잡고 있질 못했어요.
그런 저에게도 유독 좋아하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도서관에 앉아 있던 시간,
이젤 앞에 가만히 앉아 그림을 그리던 시간.
그리고,
산을 걷는 시간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등산화를 신지 않아도 괜찮았고,
옷을 챙겨 입지 않아도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고무줄 바지에 고무신을 신고도 산길은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인생을 구더기 없이 깃털처럼 가볍게 살고 싶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삶의 무게는 예전과는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제가 할 수 있었던 건 단 하나,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병원에 자주 가야 했던 아이의 건강 문제는
일상을 조금씩 갉아먹었습니다.
반복되는 입원과 수술.
그 속에서 제가 매번 빠뜨리지 않고 챙겼던 건,
책이었습니다.
언제나 캐리어 속을 가득 채운 것도, 책이었지요.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수술을 많이 하면 머리가 나빠진대요."
농담처럼 들렸지만, 저에게는 선명한 경고처럼 다가왔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병원 생활에서,
제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책을 읽어주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책 속 이야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책 속 인물로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어린이날, 소아병동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링거 줄이 달린 유모차를 밀고 음악회장에 들어갔고,
아이는 작은 손으로 박수를 치며 웃었습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찬란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수술실 앞에서 바닥에 엎드려 울며 기다렸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아기의 아픔을 제가 대신 겪게 해 주세요."
그리고 어느 날,
수술실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이 제가 되었을 때,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아기가 아닌 제가 아파서 감사합니다."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몸이 아플 때면,
그 기억들이 마치 확대경처럼 되살아납니다.
선명하고, 아프고, 또 아픕니다.
시간이 지나면 옅어진다고 하지만,
어떤 아픔은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저를 버티게 해 준 건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은 책으로 가득해졌습니다.
책과 함께 먼지도 함께 쌓였지만,
그게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아이와 함께 읽었던 책은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보물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집안 물건을 정리하면서
다른 건 버릴 수 있어도,
아이와 함께 읽은 책만큼은 차마 손이 가지 않습니다.
‘산에 갔다, 책 육아.’
저는 이 두 가지만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어느 날, 과천 현대미술관의 이건희 컬렉션 전시를 다녀온 후,
남편이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당신, 다시 그림 그려보는 건 어때?"
처음엔 당연히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선을 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2023년 4월, 다시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붓을 잡고 나니
잊고 지냈던 나 자신을 다시 만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삶이라는 건,
내가 만든 고랑으로 물이 흘러가는 것일까요?
뜻하지 않은 아픔을 겪은 후,
저는 자주 묻습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책은 제게 대답을 주었습니다.
책을 통해 저는 아이와 연결되었고,
세상과 다시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육아는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책 한 권을 같이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도,
산을 걷는 순간도,
모두 제게는 회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삶의 선물 같았고,
그 속에서 저는 제가 누군지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아플 때면,
저는 늘 지난날을 떠올리게 됩니다.
미안한 마음과 함께,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는 마음이 동시에 피어납니다.
저의 육아에는 특별한 건 없습니다.
공부를 잘하게 하고 싶다거나,
1등을 시키고 싶은 마음보다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건강하게.
빛나는 사람으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 하나로,
오늘도 책을 읽고,
또 아이를 바라봅니다.
누군가에게 이 글이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는 시간,
그림을 그리는 시간,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
삶을 다시 단단하게 세우는 힘이 되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