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습니다

오전의 화실, 오후의 엄마

by 오늘도책한잔

안녕하세요. 오늘도 책 한잔 박기량입니다.
3월 한 달은 체력 저하로 화실 문을 열 수 없었습니다. 외출이라곤 산에 가거나, 일주일에 한 번 가는 화실이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던 시간들이었어요. 그러다 4월 첫째 주, 다시 화실의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섰습니다.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는데, 창밖으로 봄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음악도 조명도 없이, 오롯이 앉아 있는 그 시간이 참 좋았어요.

이번에 사용한 바탕은 파란색인데 면천 캔버스라 물감이 잘 스며들지 않았어요. 저렴한 면천 캔버스는 일반 캔버스에 비해 천의 밀도가 낮고 표면 처리가 고르지 않아, 물감의 흡수력과 발색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유화나 아크릴화를 할 때는 이런 미세한 차이로 붓질의 느낌이 확연히 달라져요.
하지만 그 순간, 마음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래, 그래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색이 잘 입혀지지 않으면 입혀질 때까지 붓질을 하면 되지…’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고 그저 눈앞의 일에 집중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림에 사인하고 작품으로 완성하는 날도 오겠지요.
체력도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주어진 바탕이 다르듯, 저도 체력이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산에 다녀오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하루의 전부였던 저에게 ‘화실에 가는 하루’는 일주일에 단 한 번뿐인 외출이자 제 숨구멍이었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오후까지 그림을 그렸지만, 올해 4월부터는 오전까지만 화실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챙기고, 가족을 돌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사실, 선생님과 작가님들과 함께 오후까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하지만 엄마로서의 저는, 집에 돌아와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쪽만 그리다 돌아왔어요.

점심 먹고, 잠시 쉬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려 아이들을 돌보고, 내일 새벽 남편과 아들이 낚시에 갈 도시락을 준비했어요. 대부분 새벽 2~3시에 출발하기에 삼각김밥 같은 간단한 편의점 음식으로 때우지만, 이번에는 사과, 당근, 귤, 블루베리, 양배추 주스와 샐러드, 견과류, 요거트를 함께 챙겼습니다. 편의점 음식을 먹더라도 식이섬유와 함께 먹으면 혈당 조절에도 도움이 되거든요. (섬유질은 탄수화물의 흡수를 늦추고, 장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딸아이와는 2층 안방으로 올라가 조명을 켜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저희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며, 문 앞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순간 울컥했습니다.
만약 제가 체력이 좋은 엄마였다면, 아이들과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자주 외출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체력이 약한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대부분 집 안에서의 시간입니다. 덕분에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화실 다녀온 날이면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 있어야 했는데, 이제는 오전까지만 그리고 와서 오후엔 쉬고, 저녁에는 가족을 챙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삶에서 없는 것을 바라는 것보다, 지금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
아마 그게 제가 지금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기에 그림을 그린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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